지난 9일자 뉴욕타임스는 〈걱정을 멈추고, 산업형 음식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을 쓴 이들은 곧 출간될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라: 산업화로 만든 식품이 좋은 이유와 더 나은 식품을 만드는 방법》의 저자인 두트키에비츠 박사와 로젠버그 박사다.
이들은 “우리가 먹는 거의 모든 음식은, 정크푸드든 채소든 가리지 않고 산업화한 시스템의 일부”라면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시스템의 규모, 신뢰성, 안전 기준, 그리고 풍부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에덴동산 같은 이상적인 음식을 쫓는 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들 역시 “패스트푸드점과 형형색색의 정크푸드 상자로 가득 찬 식료품점 진열대가 지배하는 식생활은 심장병, 비만, 당뇨병의 만연을 초래하는 등 미국 가정의 약 14%를 식량 불안정에 시달리게 만들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이를테면 식물성 고기 대체 식품처럼 영양가 높은 자연식품을 영양가가 더 높은 가공식품 및 조리식품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식품 푸드 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다. 신문 광고만 봐도 ‘푸드테크로 여는 미래 먹거리, 강원특별자치도, K-연어 산업의 새 시대 완성’에서부터 각종 건강식품과 가공식품, 그리고 간편식 광고가 연이어 있다. 명절을 앞두고 선물용 수요를 겨냥한 것일 수도 있고, 식량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알리기 위한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가공식품을 구성하는 ‘원료’가 과연 어디서 왔는가? 라는 질문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농업은 흙의 지속가능성을 빠르게 소모하고 있다. 단기간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다 보니, 유익한 미생물이 살지 못하는 흙은 스스로 회복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작물도 영양 성분과 밀도가 예전 같지 않다. 이런 원료를 전제로 한 가공식품은, 부족한 맛과 품질을 무엇으로 보완할까? 답은 너무도 명확하다. 인공 첨가물이다.
라면 스프에 들어간 성분표를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읽기도 전에 포기하게 된다. 이름조차 낯선 향미증진제, 안정제, 유화제, 착색료…. 법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이걸 매일 먹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해 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더 이상 먹을 게 없다”며 식량 위기를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가공식품이 인류를 구할 것”이라고 외친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둘 다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소비자는 이 틈에서 길을 잃는다. 기술을 믿어야 할까? 먹을 게 없다는 불안을 따라야 할까? 자연식으로 돌아가자니 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가공식품을 받아들이자니 내 몸과 환경이 걱정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판단 기준이다.
첫째, ‘가공의 여부’보다 ‘가공의 정도’를 보자. 모든 가공식품이 나쁜 것은 아니다. 씻고, 자르고, 냉동한 식품은 오히려 식량 낭비를 줄인다. 문제는 초가공식품이다. 원재료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첨가물이 주연이 된 식품이라면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둘째, 성분표는 짧을수록 좋다. 성분 표시의 칸이 많다면,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공정의 산물이다.
셋째, 흙을 이야기하는 생산자를 기억하자. 푸드테크와 스마트팜이 아무리 화려해도, 농업의 출발점은 여전히 흙이다. 토양을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농사짓는 곳, 지역의 순환을 고민하는 생산자는 가공식품 시대에도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넷째, ‘편리함의 대가’를 소비자가 돈으로 치르고 있음을 잊지 말자. 돈이 아니라면 건강일 수 있고 미래 세대의 환경일 수도 있다.
가공식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정교해지고, 더 그럴듯한 얼굴로 우리 식탁에 올라올 것이다. 그렇다고 소비자가 무력한 존재는 아니다. 선택의 기준을 세우는 순간, 시장은 반응한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이 음식은 나를 살리는가? 아니면 나를 편리하게만 만드는가? 이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가공식품의 시대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흙이 다시 숨 쉬는 방향으로, 기술이 사람을 닮아가는 방향으로 향할 때 식탁 위의 미래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걱정을 멈추고 가공식품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