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 K-반도체, ‘메모리 초격차’ 넘어 종합 전략이 갈린다

  • 등록 2026.02.10 21: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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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공급망 분절화, 반도체 가치사슬 재정렬되는 전환기
메모리 초격차는 유지 속 설계·IP·패키징 취약성이 구조적 리스크로 부상
설계-제조-패키징 아우르는 국가전략 구축이 K-반도체의 다음 10년 좌우

 

K-반도체는 글로벌 공급망이 거세게 재편되며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장기화와 지정학적 리스크로 반도체 밸류체인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각국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압력을 높이고, 설계–제조–패키징으로 이어지는 가치사슬은 지역별로 분절된 형태로 재정렬되고 있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3460억 달러(한화 약 506조5786억원)로 전년 동기대비 18.9% 증가했다. 국가별 강점을 살펴보면 미국은 팹리스와 IP 등 설계 생태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대만은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 위탁 생산) 중심의 제조 경쟁력을 공고히 한다. 중국은 대규모 투자로 전 영역에서 추격을 시도하고, 일본과 유럽은 첨단 패키징과 장비·소재 분야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초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수십 년간 대규모 투자를 지속해 왔다. D램(DRAM)·낸드(NAND) 초미세 공정,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고난도 기술에서 한국 기업은 양산 속도와 수율로 타국을 압도한다.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장기간 축적한 경험에 기반해 긴밀한 협력을 구축하고, 일본 수출 규제 이후 국산화에 속도를 내며 공급망도 안정화됐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정 엔지니어 중심 ‘현장 기술력’, 정부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세제 혜택, 인력 양성 등 국가적 지원이 이어진 결과다.


반도체 산업의 중심축이 ‘설계–제조–패키징’ 전 영역으로 확장되며, 우리의 취약한 팹리스·IP 역량과 뒤처진 첨단 패키징 경쟁력은 리스크로 불거지고 있다. K-반도체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제조’를 넘어 밸류체인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지금이 AI메모리를 통해 메모리 분야의 경쟁력을 더욱 공고히 할 때”라고 강조한다.

 


◇메모리 강국의 그림자...설계·IP 취약성과 공급망 리스크 부상


한국 반도체 밸류체인의 가장 취약한 고리는 ‘설계와 IP(Intellectual Property, 설계자산)’ 분야다. 글로벌 팹리스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존재감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시스템 반도체 수요가 AI·자동차·모바일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흐름과 대비된다. 핵심 IP와 설계 자동화 툴(Electronic Design Automation, EDA) 역시 ARM, 시놉시스, 케이던스 등 해외 기업 의존도가 높아, 국내 생태계가 독자적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국내 팹리스 산업은 스타트업·중견기업 중심으로 자본 조달 어려움과 인력 부족, 글로벌 시장 진입 장벽 등이 성장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고성능 AI 칩과 차량용 반도체처럼 기술 난도가 높은 분야에서는 대규모 R&D 투자와 IP 축적이 필수이지만, 국내 기업들은 감당할 기반이 충분하지 않다. 설계 인력 양성 속도도 느려 전문인력 확보도 힘든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설계·IP 생태계의 취약성은 제조 강점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의 구조적 리스크로 이어진다. 설계 역량 강화 없이는 K-반도체의 글로벌 경쟁력도 지속되기 어렵다는 경고가 커지고 있다. ‘장비·소재’ 분야에서는 EUV 포토레지스트, 특수가스, CMP 슬러리 등 일부 핵심 소재에서 국산화가 진전되며 공급망 안정성도 강화되는 추세다. 제조 생태계 전반의 기술력과 생산 효율성은 여전히 세계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 반도체 제조 부문을 보면 메모리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며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고, 초미세 공정·HBM 등에서 압도적 우위를 이어가고 있다. 파운드리에서는 TSMC에 뒤처지지만, 삼성전자가 GAA 기반의 차세대 공정에서 반전의 기회를 노리며 기술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외부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미국·일본·대만의 반도체 공급망 동맹 강화로 한국 제조 경쟁력은 지정학적 압력과 정책적 변수가 더 커지고 있다. 기술력에 관계 없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한국의 제조 우위가 언제든 흔들릴 수도 있다.

 

◇공급망 재편의 한가운데 선 한국 반도체...초격차 유지의 조건


AI와 HPC(High Performance Computing, 고성능 컴퓨팅)가 주도하는 차세대 반도체 경쟁에서 ‘패키징’이 새 승부처가 되고 있다. 고성능을 구현하기 위해 여러 칩을 하나로 묶는 칩렛 구조와 3D 패키징 기술이 부상하며 후공정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

 

미국과 대만은 이미 첨단 패키징 클러스터 구축에 속도를 내며 글로벌 주도권 확보에 나서지만, 한국은 제조 강국임에도 메모리·파운드리 중심의 산업 구조가 패키징 경쟁력 확대로 이어지지 못하며 AI 반도체 시대에 필요한 통합 기술 역량에서 뒤처질 위험도 제기된다. 제조에서 확보한 강점을 패키징으로 확장하지 못한다면, K-반도체의 경쟁 우위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가속화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위치도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칩스법(CHIPS Act)을 통해 자국 내 생산·첨단 패키징 투자를 강화하고, 일본·대만은 국가 주도로 패키징 클러스터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또 중국은 보조금을 뿌려 반도체 자급률을 끌어올리며 독자 생태계를 구축 중이다.

 

이처럼 주요 국가가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가운데 우리가 기존 ‘메모리 중심 국가’에 한정한다면 글로벌 밸류체인 내 위상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는 "한국이 설계–제조–패키징을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전략을 구축하면, 메모리 초격차와 축적된 제조 역량에 기반해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 허브로 도약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기술·인력·투자·정책의 통합적 국가전략이 뒷받침된다면, K-반도체는 공급망 재편 파고 속에서 새로운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한국의 메모리 초격차는 ‘투자-기술-공정-생태계-인력’이라는 다섯 가지 핵심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결과다. 반도체 산업의 세계적 변화 추세 속에서 초격차를 설계와 패키징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가 K-반도체의 차기 과제로 꼽히고 있다.

 

 

◇‘종합 반도체 국가 전략’이 K-반도체의 미래를 결정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존 메모리 분야에서의 우위에 자만하지 않고, 밸류체인 전체의 균형적 강화를 추구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AI·HPC 중심의 기술 패러다임이 바뀌며 밸류체인 가화가 새로운 생존 조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를 위해 세 가지를 강화해야 한다. 첫째, 설계·IP 생태계 강화로, 팹리스 기업의 성장 기반을 확장하고, EDA·IP·인력·투자 생태계를 국가 차원에서 구축해야 한다. 둘째, 제조 초격차 유지와 파운드리 경쟁력 확보로 GAA(Gate-All-Around, 트랜지스터 채널 4면을 게이트가 둘러싸 전류 제어를 강화해 효율을 높이는 차세대 구조), EUV, HPC 공정 등 차세대 기술에서 선도권을 확보해야만 제조 강국의 지위를 지킬 수 있다. 셋째, 첨단 패키징 역량 강화로 칩렛·3D 패키징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고, 국가 차원의 패키징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것이다.


설계–제조–패키징을 하나의 전략으로 묶어내는 ‘K-반도체 종합 국가 전략’은 단순히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적 패러다임 전환이다. 기술·인력·투자·정책 통합의 국가적 로드맵 없이는 공급망 재편의 파고를 넘기 어렵다. 반도체 밸류체인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적 전환이 K-반도체의 다음 10년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국내 반도체 전문가들은 한국이 세계 1위를 유지하는 메모리 분야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메모리 중심 AI’ 기술을 선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연구기관 전문가는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메모리의 역할이 단순 저장을 넘어 연산과 지능 기능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는 만큼, 한국이 AI 메모리 분야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반면 시스템반도체 분야는 공정, 설계 툴, 재료 등 핵심 요소의 해외 의존도가 높아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자와 통화한 전문가들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반도체와 CPU 등 고부가가치 분야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팹리스가 설계한 칩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 실증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우리 기술 수준이 아직 낮더라도 꾸준히 사용하고 개선해 나가는 생태계가 마련돼야 한다”며 “설계·운용·측정장비 등 전반적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는 지원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영명 기자 paulkim@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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