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약·바이오 산업이 급성장 국면에 접어들면서 한국뿐 아니라 세계 최대 바이오 강국인 미국도 이를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인공지능(AI)·로봇·자동차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이미 글로벌 시장을 위협하고 있는 중국이 제약·바이오 분야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 지원 규모와 인력 등 물리적 여건만 놓고 보면 중국은 이미 한국과 단순 비교가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이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바이오 강국 수준에 이르렀으며, 한국 기업들은 중국과의 파트너십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한국 정부 역시 임상시험, 허가·승인, 재정 지원 등 제도적 지원의 ‘양’뿐 아니라 ‘질’을 함께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중국을 앞섰다거나 뒤처졌다는 단순 경쟁 구도를 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국가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미국도 위협 느낀 중국 바이오…WHO 임상 등록 건수 추월
28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1월 16일 막을 내린 ‘2026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서는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총 73억 달러(약 10조4000억원) 이상의 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 바이오기업 레미젠(RemeGen)은 미국 제약사 애브비(AbbVie)에 이중항체 항암제 후보물질 ‘RC148’을 최대 56억 달러(약 8조2000억원) 규모로 기술이전했다. 중국계 바이오벤처 사이뉴로파마슈티컬(Sineuro Pharmaceuticals)은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뇌로 전달하는 항체 기술을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Novartis)에 최대 17억 달러(약 2조5000억원)에 이전했다. 중국 존센펩립바이오텍(Zonsen PepLib Biotech) 역시 방사성 리간드 치료제를 노바티스에 기술이전하며 선급금 5000만 달러(약 740억원)를 받았다.
중국 기업들의 기술수출 규모는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2024년에는 94건, 519억 달러(약 73조9000억원) 규모였던 기술수출이 지난해에는 150건, 1300억 달러(약 185조원)로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바이오산업 육성 정책과 전략적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를 기반으로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의 신약 개발과 임상 역량이 급격히 성장했다고 평가한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이 미국·중국·유럽의 ‘3강 구도’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AI 기반 신약개발 분야에서도 중국의 존재감은 커지고 있다. 최근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 파이낸셜 포럼’에서는 “AI가 후보물질 발굴 단계를 넘어, AI가 설계한 화합물이 실제 파이프라인으로 진입하는 사례를 중국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됐다.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미국 의회 자문기구인 신흥 바이오기술 국가안보위원회(NSCEB)는 지난해 4월 중국 바이오기술이 미국을 앞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긴급 대응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 데 남은 시간이 3년에 불과하다는 추가 보고서를 내놓았다. 해당 보고서는 2040년 중국 의약품이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의 35%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임상시험에서도 중국은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 2024년 중국은 세계보건기구(WHO) 국제 데이터베이스에 7100건 이상의 임상시험을 등록해, 약 6000건을 기록한 미국을 넘어섰다. NSCEB는 “미국 정부가 필요한 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경우 중국의 바이오 경쟁력이 극복하기 어려운 격차로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한국도 기술 경쟁력 확보…작년 기술수출 20조원 달성
중국의 급부상 속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정부 역시 바이오산업을 한국 경제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규제 개혁과 재정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금융위원회는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바이오·백신 분야에 11조6000억원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지난해 한국 기업의 기술수출은 17건, 약 18조111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4건은 계약 규모가 공개되지 않아, 전체 기술수출 금액은 20조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신약 개발의 필수 관문인 임상시험도 활발하다. 임상시험수탁기관 인투인월드의 ‘2025년 식품의약품안전처 임상시험계획 승인 동향 및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승인된 임상시험은 636건이었다. 2023년 승인 건수는 1723건에 달했다.
◇ 중국 바이오, 경쟁 넘어 협력의 대상으로
중국과 한국은 항체, ADC, mRNA, 유전자치료 등 다양한 신약 영역에서 동시에 도전하고 있으며 일정 수준의 성과를 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중국을 단순 경쟁자로 보기보다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하고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중국 바이오 산업의 성장은 규제 환경, 예산 규모, 인력 측면에서 이미 글로벌 수준에 도달한 결과”라며 “한국이 중국과 정면 경쟁하는 단계는 지났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성장으로 글로벌 바이오 시장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도 함께 커지고 있다”며 “한국 역시 기술력이 뒤처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경쟁과 협력을 병행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국을 미국이나 유럽 시장을 보듯 접근해야 하며, 정치적 갈등과 산업 논리를 분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협력 방식과 관련해서는 “글로벌 임상 이전 단계에서 개념검증(PoC)을 중국에서 진행하거나, 중국의 자본과 결합한 공동 연구 형태가 현실적인 모델”이라며 “임상 2a·2b 단계까지 중국과 협력한 뒤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는 전략이 향후 3년 내 가시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 “중국 정부 인허가 속도 참고할 필요”
업계에서는 한국 정부도 중국의 제도 운영 방식에서 참고할 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 정부의 신속한 인허가와 행정 처리 방식은 분명 배울 만한 부분”이라며 “민간과 정부가 역할을 분담해 중국의 강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 기술의 질적 수준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신중한 평가가 이어진다. 이 관계자는 “과거 ‘임상을 하려면 중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임상 환경이 빠르게 구축됐고, 이를 기반으로 신약 모달리티와 개발 역량도 상당 부분 발전했다”며 “중국 바이오 기술을 무조건 신뢰하거나 과소평가하기보다, 장단을 함께 냉정하게 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