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K 기업은행 부산최고 경영자클럽 회장 / (주)에스이피 양한석 회장

2012.12.07 14:43:10

제계·정치·종교·문화 등 두루 역량 펼친 수출포장업계의 대부


충북 보은의 시골 출신으로 태어나 연고도 없는 부산에 정착해 사업을 일으킨 인물.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한으로 남기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만학의 꿈을 펼친 그는 이제 국내 수출포장업계의 대부로 통한다. (주)에스이피/신진수출포장의 양한석 대표를 일컫는 수식어다. 고희를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양한석 회장의 삶을 회고해 보았다.

생산량·판매량 1위 지켜 온 원조 수출포장 전문 기업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에 위치한 (주)에스이피/신진수출포장은 1968년 설립해 올해로 44년째 이어가고 있는 기업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평균수명이 12.5년이라는 통계에 비춰볼 때 결코 짧지 않은 역사다. 신진수출포장의 주력 제품은 수산물 포장지로, 포장용 종이박스와 포장지를 러시아 연방국가 등에 수출하고 있고 국내에는 주문생산방식을 통해 납품, 연간 1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명실공히 생산량과 판매량 모두 선두를 달리고 있는 수출포장업계의 독보적 기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오랜 노하우를 통해 얻은 방수처리 및 신선도 유지 기술은 업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1986년에 부산 사상공단에서 지금의 경남 김해시 장유로 공장 부지를 이전, 1만3000여㎡ 규모로 확장하고 최첨단시설로 모든 생산설비를 자동화시스템으로 탈바꿈했다. 2007년에는 (주)에스이피를 설립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중견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골판지 포장업계에서는 국내 최장수 기업이라 할 만큼 오직 한 길만을 보며 달려온 양한석 회장. 그가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믿음을 통해 얻은 작은 인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기회 ‘신진수출포장’
양회장은 군복무 시절 차출되어 간 경리학교에서 우수한 시험성적으로 원하는 곳에 자대 배치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부산 항만사령부 경리과에서 군 생활을 보내게 된다. 덕분에 부산으로 오게 된 그는 항만 경리과 예산계에서 일하면서 주일이면 부대 내 군인교회에 나갔고 오후에는 민간인 교회인 새마을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그를 눈여겨 본 교회 장로는 제대 후 진로에 대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자신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업을 혼자 오래 유지할 수 없다. 당신이라면 믿을만하니 함께 사업을 운영해 키워보자’는 얘기였다.
양 회장은 가족들과 상의 끝에 고향에 있는 양 회장 몫의 상속분 전답을 팔아다 투자 자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사업을 시작한지 3년. 함께 동업했던 장로는 세상을 뜨게 되고, 양 회장은 사업을 인수하게 되었다.
양 회장은 “당시에는 신발, 내의, 섬유, 봉제 등을 전부 골판지 박스로 포장했기 때문에 포장박스는 없어서 못 팔 만큼 인기였다. 많은 대기업에 납품을 했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주문 물량은 넘쳐났고 사업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져 1975년 완공된 부산 사상공단에도 제일 먼저 입주하게 되었다.
양 회장은 모은 재산으로 집을 사거나 가세 확장에 쓰지 않고 사업에 재투자 했다. 1986년에는 당시 2970여㎡(약 900평)였던 사상공단에서 더욱 규모를 늘려 1만3000여㎡의 김해 장유 공장으로 이전하기에 이른다.

변화와 도전은 즐기고, 정직과 신용은 지켜라
양 회장은 이렇게 사업을 확장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변화에 대비했다. 그는 IMF 위기에도 2년 먼저 앞서 경영전반을 재검토하고 업종의 다각화를 모색했다. 사업성이 없는 기존의 섬유·신발업계와의 거래 비중을 줄이고 수산업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양 회장은 원양어선을 통해 들어온 수산물을 냉동된 상태에서 그대로 트럭에 싣고 다니던 기존의 방식에 문제점을 느꼈다. 그는 비닐을 넣은 지대가 필요하다 느끼고 이를 위한 자동화 전문공장 설비를 갖추었다. 이 사업을 전문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주)에스이피라는 별도 법인도 세웠다.
그 사이 변화에 대비하지 못한 많은 유사업체들이 줄도산하며 사라져갔다. 그러나 닥쳐올 위기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변화를 모색한 신진수출포장은 대기업 계열사 외에는 살아남기 힘든 위기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다.
양 회장은 이처럼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 그는 사업에 필요한 세미나라면 거리와 상관없이 찾아다니며 듣는다. 또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통해 국내,외 경영환경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가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와 도전, 더불어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직과 신용이다. 정직을 사훈으로 삼고 있을 만큼 양 회장은 고객 및 거래처와의 약속과 신용을 중요시한다. 그는 한 번 인연을 맺은 거래처는 담당자가 바뀌어도 꾸준히 유지해나갈 만큼 정직과 신용의 경영철학을 지켜나가고 있다.

부산시 남구의회 초대의장 지내며 정·제계를 넘나들다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선 양한석 회장. 그는 장유기업체협의회 회장, IBK 기업은행 부산최고 경영자클럽 회장직 등을 맡으며 부산의 상징적인 기업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가 처음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30여 년 전이다. 당시 40대였던 양 회장은 급성 활동성 간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해 부친상조차 제대로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양 회장은 3개월 입원 후 퇴원하면서 다시 한 번 살아갈 기회를 준 하나님께 감사를 느끼고 그 길로 감림산 기도원을 찾았다. 양 회장은 “기도하면서 윤리적으로 많은 것을 후회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경영과 이윤에만 치중해 직원들의 인권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면서 회개의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후 양 회장은 자신의 기업은 물론이고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지역 동장의 권유로 사회정화위원장 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거리질서운동, 불우이웃돕기 등을 하면서 구청 사회정화사무국 사무국장에 천거되기도 했다. 그는 1986년 광주 동구에 찾아가 자매 결연을 맺으며 영호남간의 갈등 완화에도 이바지해 그해 11월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그의 지역 봉사활동이 세간에 알려지자 정치적 입지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일류대학 출신 및 지역의 유명 인사들을 제치고 부산시 남구의회의 초대의장이 되었다. 양 회장은 의회 활동을 통해 대통령 표창장 2개, 부산시장 표창장, 96 자랑스런 부산시민 청년대상을 받았다.
하지만 양 회장의 정치 행보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지자체 의회 4년 후 치러진 지자체장 선거에서 구청장 후보로 당선되어 시지부를 거쳐 중앙당에 올라갔지만 선거운동 중 갑자기 후보자가 바뀌게 되었다. 중앙당에서 학력이 높은 사람에게 공천을 바꿔준 것이었다. 그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비록 학위는 받지 못했으나 부산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최고관리자 과정, 하버드대 법정대학원 고위정책연구과정 등 8개나 되는 과정을 마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학력 미달은 너무도 뼈아픈 상처가 되었고, 그는 자존심 회복을 위해, 상처를 씻어내기 위해 만학도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고입 검정고시부터 박사학위까지, 세월도 비켜간 학구열
그가 고입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한 때는 이미 50이 넘은 나이였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초등학교 이후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못했던 그는 3개월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연이어 대입 검정고시 준비에 돌입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던 장남을 붙들고 공부에 집중적으로 매진했다. 4개월 후 그는 고교과정도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다. 이렇게 7개월 만에 중고교 과정을 모두 마친 양 회장은 내친김에 대학입시까지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동의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천명의 만학도로서 거침없었던 그의 행보는 당시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을 만큼 화제였다. 하지만 그의 학구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아들, 딸과 같은 학부생들과 어울려 강의를 들으면서 그는 진짜 공부의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양 회장은 석사과정에 돌입했고 이어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되었다.
요즘은 글을 쓰는 것이 좋아 시와 수필에 빠져있다고 한다. 얼마나 글쓰기에 심취했는지 계간 ‘문예운동’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월간 ‘문학세계’를 통해서는 수필가로 등단했을 정도다. 또한 <푸른 꿈과의 동행>, <양지로 서는 자유>라는 2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양 회장은 시가 주는 즐거움이 크다고 말한다. 그는 “시를 쓰면 마음을 내려놓게 되어 좋다. 새벽기도 후 고요한 가운데 펜을 잡으면 시상이 잘 떠오르곤 한다. 요즘은 글을 쓰는 순간이 즐겁다”고 말했다. 
  
‘꿈을 갖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
양 회장은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이 모든 성취의 비결은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는 “꿈이 없는 이는 매사가 부정적이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면서 꿈이 있어야만 새로운 도전이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모든 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와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이야기했다. 특히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면서 항상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걷는 길,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나이나 지위, 학력 등 지금의 조건들은 어떻게 마음먹고 최선을 다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은퇴했다고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 은퇴 후라도 더욱 바쁘고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해나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하나님 앞에 가는 날까지 후학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에 남은 생을 바치겠다는 양한석 회장. 자서전이나 시, 수필과 같은 글 뿐만아니라, 강의와 사업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그는 꿈이 있기에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감사할 줄 알기에 나눌 줄 안다. 그리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에 그는 언제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김준현 기자 기자 kjh@mbc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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