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임박했다는 관측과 함께, 한국에서도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대선 주요 공약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은행과 금융당국도 관련 정책 마련에 속도를 내면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법제화가 본격화될 조짐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에 가치를 고정한 가상자산으로, 대표적으로 1달러에 고정된 USDT(테더), USDC(USD코인) 등이 있다. 초기에는 가상자산 시장 내에서 사용됐지만, 수수료나 규제가 없어 송금·환전 등 결제 시장에서도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 실제로 동대문 의류시장에서는 일부 중국 보따리상이나 소형 수출입 업체가 테더로 결제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시장 규모는 1년 새 70% 이상 성장했으며, 일본·홍콩·EU는 자국 통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법제화를 이미 완료했다. 지난해 말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자 국내 달러 스테이블코인 거래대금도 3배 이상 급등했다.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 밖에서 거래수단으로 자리 잡은 만큼,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 '美 불확실성'에 떠오르는 가상자산, 새로운 국제 통화질서로 부상?
최근 가상자산, 특히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글로벌 관심이 다시금 고조되고 있다. 미국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과 달러에 대한 신뢰 약화가 주요 배경으로 지목된다.
국제금융센터 주최로 28일 서울 중구 YWCA에서 열린 ‘가상화폐, 금융의 新패러다임 전환인가?’ 세미나에 발제자로 나선 임민호 신영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팬데믹, 러우전쟁 이후, 미국의 적성국을 중심으로 달러 대신 가상자산에서 통화 안정성을 모색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최근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이 미국과 서방에 의해 동결된 사건은 지정학 리스크가 현실화된 대표 사례로, 글로벌 투자자와 각국 정부가 달러 중심의 국제 금융질서에 회의를 품게 된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임 연구원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글로벌 통화체제 균열이 가상자산과 금의 동반 강세를 유도하고 있다”며 “중앙은행들은 금 보유를 늘리고 있으며, 가상자산은 희소성, 디플레이션 구조, 검열 저항성의 특성을 바탕으로 대체 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가상자산은 브라질, 터키, 아르헨티나 등 고물가에 시달리는 신흥국에서 대안 통화로 각광받고 있다. 임 연구원은 “브라질, 터키는 자국 통화보다 비트코인이나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하는 것이 실질 효용을 더 높여주는 상황”이라며 “이는 정부 정책과 무관하게 자연 발생적으로 가상자산 채택이 확산되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가상자산은 미국의 제재 대상국인 러시아, 이란, 북한 등에서도 결제 및 금융 제재 회피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임 연구원은 “미국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 속에 가상자산은 미국과 갈등을 겪는 국가들과 신흥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국제 통화질서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흐름”이라고 진단했다.
◇ 가상자산 규제 푸는 미국... ‘스테이블코인’으로 ‘글로벌 금융패권’ 노려
미국도 디지털 금융 패권 강화를 위한 전략으로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확장과 비트코인의 전략적 비축에 본격 나서고 있다. 임민호 연구원은 “미국의 디지털 금융 패권 전략은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며 “첫째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기반 인프라 확대, 둘째는 비트코인의 전략적 비축자산화”라고 설명했다.
임 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채를 담보로 발행되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국채 수요증가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달러 패권 유지에 기여하게 된다. 더불어 비트코인은 총 공급량이 2100만개로 한정돼 있어 희소성이 강화면서도 디지털 특성상 거래투명성이 확보돼 중앙은행이나 국가차원의 자산 다각화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의 '가상자산 전략'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주도 하에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함께 추진 중이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비트코인을 주식처럼 사고팔 수 있게 한 ETF 거래를 승인하면서 가상자산을 제도권 금융시장에 편입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 발행 기준을 규정하는 ‘지니어스(GENIUS) 법안’을 상원에서 논의 중이다. 여야 간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만큼 법안의 조기 통과 가능성도 크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28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비트코인 2025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조 바이든 정부의 가상화폐 탄압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스테이블코인은 달러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는 수단이다. 이에 지니어스 법안이 스테이블코인 활동을 미국 내로 집중시켜 달러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흐름에 대해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박사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시작된 스테이블코인 중심 전략은 기존 금융망인 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블록체인 금융 인프라 확보에 중점을 둔다”며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 제재 등 지정학적 변수 속에서 미국은 블록체인 기반 결제 시스템의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스테이블코인 경쟁에서 뒤처지는 한국… 제도정비 시급
김갑래 박사에 따르면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5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며, 토큰 증권 시장을 본격적으로 활성화하고 있다. 토큰 증권은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전통 자산을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토큰으로 발행·유통하는 증권 형태를 말한다.
특히 미국 국채가 블록체인 위에서 거래되는 ‘토큰화’가 활발히 진행 중이며 스테이블코인(대표적으로 USDC)이 국채 및 머니마켓펀드(MMF)와 연계돼 자금 흐름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법과 제도가 미비해 주요 사업자들이 해외로 이탈하거나 사업 자체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 박사는 “3년 전부터 추진됐던 토큰 증권 사업들이 입법 지연으로 중단됐고, 이로 인해 기술 격차가 심화됐다”며 “법 제정과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한국 시장이 해외에서 발행된 스테이블코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역외 발행’ 구조에 놓여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역외 발행이란 스테이블코인이 해외에서 발행돼 국내에서 유통되는 구조로 이로 인해 ▲영문 정보 의존 ▲발행인 신뢰성 부족 ▲규제 사각지대 등으로 인해 투자자 보호가 미흡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김 박사는 “법과 인프라 구축을 병행하고, 자율 규제와 감시 기능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국제적 흐름에 따라 정부도 가상자산 기본법(2단계 입법)을 추진 중이며, 증권형 토큰에 대해서는 전자증권법과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한 법적 기반 마련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스테이블 코인과 관련한 입장에 대해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스테이블 코인의 혁신 가능성을 보면 적극적인 장려가 필요하다”면서도 “원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은 금융안정과 통화정책 측면에서 한국은행이 감독 가능한 은행권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가상자산 기본법 제정에 대해 김 박사는 “가상자산과 토큰 증권은 하나의 거래에 두 가지 법률이 동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국제 기준에 맞는 정교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