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국제 원유시장이 다시 ‘지정학 프리미엄’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이 일주일째 이어지는 가운데, 이란이 세계 원유 해상 운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국제 유가가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이란은 보복 조치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과 상선에 대한 발포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30%가 통과하는 전략 요충지로, 군사 충돌이 확대될 경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전체에 직접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핵심 통로다.
시장에서는 이번 사태가 단기 충돌을 넘어 장기적인 지정학 리스크로 전환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란이 해협 봉쇄나 역내 미군 기지·유전시설에 대한 비대칭 공격을 확대할 경우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 120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금융시장에서 지정학적 뉴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투기성 자금까지 유입되면서 유가는 이미 ‘지정학 프리미엄’이 반영된 가격 구조로 이동하는 양상이다.
◇ 전 세계 ‘에너지 병목’ 호르무즈 해협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연결하는 폭이 40km에 달하는 좁은 해협이지만, 세계 에너지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국제에너지기구(IEA)와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하루 2000만 배럴 안팎의 원유와 석유제품이 이 해협을 통과한다. 이는 전 세계 원유 소비량의 20%, 해상 운송 기준으로는 30%에 해당하는 규모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페르시아만 산유국의 원유 수출 대부분이 이 해협을 통해 이뤄진다. 아시아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중국·일본 역시 중동 원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여오고 있다.
세계 원유 생산 기준으로 보면, 이들 페르시아만 주요 산유국의 생산량은 전 세계 원유 생산의 30% 안팎을 차지한다. 즉 해당 지역의 군사적 충돌이 심화될 경우 공급망 충격이 단순한 해상 운송 문제가 아니라 세계 생산 구조 전체로 확산될 수 있는 잠재적 리스크로 평가된다.
에너지 시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힐 경우 단기간에 대체할 수 있는 수송로가 제한적이라는 점을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보고 있다. 사우디와 UAE가 일부 원유를 홍해나 아라비아해 방향으로 우회 수송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갖고 있지만, 전체 물량을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 많다.
◇ 트럼프 “가격 상승 신경 안 쓴다”...엇갈린 메시지
다만 이번 중동 사태가 실제 장기적인 유가 급등으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앞서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국제 상선과 유조선을 미군이 호위하고, 원유 수송 선박에 보험 및 금융 보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히며 해상 수송 안전 확보 의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원유 가격 상승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발언해 시장에 엇갈린 메시지를 보냈다.
5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원유 가격이 오르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군사 작전이 나의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 사태가 끝나면 가격은 매우 빠르게 떨어질 것”이라며 “지금 가격 상승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국제유가는 중동 긴장 고조 소식에 일제히 상승했다. 글로벌 기준 유종인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4.01달러(4.93%) 상승한 85.41달러를 기록했다. 미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역시 6.35달러(8.51%) 급등한 배럴당 81.01달러로 마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두 원유 가격 모두 2024년 7월 이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며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유가 상승의 주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 산유국 증산 여력 변수...저장 능력은 제한적
유가 상승세가 장기화될지 여부는 주요 산유국들의 증산 능력에 달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주요 산유국은 일정 수준의 증산 여력을 보유하고 있어 유가 급등을 완충할 수 있는 변수로 거론된다.
다만, 이란 공습 이후 세계 5위 산유국인 이라크는 원유 생산량을 절반 이하로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 운항이 차질을 빚으면서 수출이 지연됐고, 저장 시설이 빠르게 포화 상태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만 연안 주요 산유국(사우디아라비아·UAE·쿠웨이트·이라크)이 보유한 원유 저장 능력은 총 1억 배럴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현재 상황이 지속될 경우 이들 저장시설도 3주에서 최대 1개월 정도면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논평했다. 이 경우 저장 공간 부족으로 인해 산유국들이 이라크처럼 생산량을 줄이는 조치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분쟁이 장기화되거나 호르무즈 해협이 실제로 장기간 봉쇄될 경우,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서 최대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한편, 정부는 전쟁의 향방과 호르무즈 해협의 실제 봉쇄 기간이 우리 경제에 미칠 핵심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측하고 물가 안정과 수급 조절을 위해 24시간 모니터링 체제를 가동 중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