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푸드 카드가 던진 시사점
도시의 밤이 깊어지고, 야외무대의 조명이 켜진다. 무대 뒤 복도에서 한 K-팝 스타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전남 K-푸드 카드’를 꺼내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리고 한 문장 “한국엔 K-푸드 카드가 있다”라는 장면은 곧바로 한 지역의 골목 식당으로 전환된다. 김이 오르는 냄비, 싱싱한 채소와 생선, 카드 결제 단말기의 ‘승인’ 불빛, 어르신의 안도와 아이의 웃음이 이어진다.
한 장의 카드가 한 끼 식사와 한 재료를 잇는 순간, 그것이 한 지자체가 시작한 국민급식의 출발선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광고가 아니다. 국민 모두가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음식을 먹을 권리, 즉 ‘먹거리 기본권’의 선언이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친환경 농업 면적 2배 확대는 그 선언을 실천하는 첫걸음이자, 농업·복지·유통을 통합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면적을 두 배로 늘린다고 해서 지속가능한 친환경 농업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구조의 개혁이다. 제도, 토지, 유통, 시장, 데이터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농지제도의 문제
정부는 2025년부터 유기농 논 직불금 단가를 70만 원에서 95만 원으로, 무농약 논은 50만 원에서 75만 원으로 인상했다. 약 35~50% 수준의 인상으로, 친환경 벼 재배 확대를 유도하기 위한 조치다. 또한 제6차 「친환경농산물 육성 5개년 계획(2026~2030)」에 따라 2024년 3만 5천ha 수준의 친환경 벼 재배면적을 2030년 7만 3천ha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방향은 옳지만, 현장의 제약을 넘어설 구조적 변화가 없다면 이 목표는 단지 숫자에 그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땅이다. 현재의 농지제도는 땅을 가진 사람 중심이지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다.
한국의 친환경 농가 중 약 60%는 임차농이다. 이들은 실제로 농사를 짓지만, 토지 명의가 지주에게 있어 직불금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인증이 취소되는 경우가 잦다. 2021년 LH 직원들의 농지 투기 사건 이후, 정부는 농지대장을 신설하고 공익직불금 부정수급 단속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실경작자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했다. 김포에서는 명의 불일치로 인증이 취소되고, 평택에서는 수확을 앞두고 인증이 박탈되는 사례도 있었다.
친환경 농업은 시간이 만드는 농업이다. 유기물의 순환과 토양 복원에는 최소 3년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임차농은 1~2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며 경작지를 옮겨 다닌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어떤 지원도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이에 국회에서는 ‘친환경농지 장기임차 특례조항’을 포함한 「농지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다. 10년 이상 임차 시 세제 감면, 임대료 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 친환경농지 임대 허용 등이 골자다. 이 조항이 통과되어야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비로소 현실 속에서 실현될 것이다.
◇ 소비의 문제
생산 기반이 마련되면, 다음은 수요의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 친환경 농업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나면 소비도 두 배로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과잉, 가격하락, 인증포기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현재 한국의 친환경농산물 유통 비중은 급식 31.7%, 중소형마트 26%, 대형유통 16.1%, 생협 7.2%, 온라인 5.8%다. 이 중 학교급식은 가장 안정적이고 공공성이 높은 수요처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4년 학교급식 예산은 8조 원을 넘어섰으며, 그 절반 이상이 식품비다. 지자체의 친환경 식재료 지원 예산은 2,866억 원이고, 급식지원센터를 운영 중인 지자체는 전체의 40% 수준이다. 이 센터를 통해 공급되는 농산물의 68%가 친환경 인증 품목이며, 학교급식용 쌀의 90%가 친환경 쌀이다.
그러나 지역 간 농가 편차(75.5%), 예산 부족(53.1%), 공급 불안정(14.3%)이 여전히 확산의 걸림돌이다. 학교급식이 단기 성과 중심이 아니라, 지역 생산망과 연계된 국민급식체계로 진화해야 한다. 학교급식이 씨앗이라면 공공급식은 줄기이고, 국민급식은 숲이다.
그런데 현재 공공급식에서 친환경 식재료 사용은 법적 의무가 아닌 권고 수준에 머물러 있다. 현행 「친환경농어업 육성법」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친환경농산물의 우선 사용을 권장할 수 있다”고만 규정돼 있다. 즉 의무가 아니라, ‘선택적 권장’이다.
이제는 단순한 권고제에서 벗어나 사회적 의무화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행정명령으로 강제하는 의무가 아니라, 공시와 참여를 통해 사회 전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의무를 말한다. 「학교급식법」이나 「국가계약법 시행령」에 ‘공공급식 식재료의 일정 비율 이상을 친환경농산물로 우선 조달하도록 노력한다’는 조항과 함께 각 지자체의 조달 비율과 급식 품질, 친환경 비중을 공시제 형태로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 데이터가 공개되면 국민은 자신이 사는 지역의 급식 수준을 직접 확인할 수 있고, 학부모·시민단체·지자체가 함께 친환경 급식 확대를 사회적 요구로 형성할 수 있다. 즉 위로부터의 명령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지는 공공적 의무인 것이다.
국가와 지자체는 이러한 사회적 합의에 맞춰 차액지원금 매칭 제도를 운영하고, 재정이 취약한 지역도 안정적으로 친환경 급식을 운영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그럴 때 친환경 농업 면적 확대 정책은 단순한 행정 목표가 아니라, 국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먹거리 기본권의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을 것이다.
◇ 물류의 문제
이제 쟁점은 물류체계의 방향이다. 정부는 “물류비 절감 및 공급망 안정”을 명분으로 2030년까지 친환경농산물 전용 거점물류센터를 추가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경기 광주(480억, 2012년 개장)와 전남 나주(278억, 2017년 준공)에 광역단위 친환경 물류센터가 설치되어 있다. 앞으로는 별도의 친환경 거점물류센터를 짓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 공영도매시장 내에 친환경물류체계를 갖추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의 공공급식 공급망은 농협·생협·학교급식지원센터 등 기관별로 분절되어 있고, 산지–도매시장–급식소 간의 정보 흐름이 단절되어 있다. 이 때문에 물류비는 줄지 않고, 거래 정보도 분산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도매시장이 공공물류의 중심으로 새롭게 기능을 갖춰나가야 한다.
현재 도매시장은 집하·선별·저온저장·소포장 등 핵심 기능이 시장별로 표준화되어 있지 않지만, 이러한 기능적 인프라를 단계적으로 강화하고 시장 내부에 친환경 전용 존(zone)을 설치하면 공동집배송·품질관리·가격연동이 가능해진다. 친환경 물류는 도매시장 밖이 아니라, 시장 안에서 작동할 때 비용·정보·품질 관리가 효율화된다. 전국 32개 공영도매시장 네트워크에 국민급식 연계를 더하면, 생산지–시장–급식소를 잇는 통합형 공공유통망이 완성된다.
◇지속가능성과 국민급식
친환경 농업의 지속가능성이 담보되려면, 지원은 실경작자에게 정확히, 땅은 장기임차로 안정되게, 시장은 국민급식으로 넓게, 물류는 도매시장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데이터는 모든 주체를 투명하게 연결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한 장의 K-푸드 카드는 단순한 복지카드가 아니라, 국민의 선택권과 지역경제를 함께 설계한 먹거리 순환 플랫폼이 된다.
국민급식을 예로 들자면, 전남 K-푸드 카드는 월정 한도 내에서 두 가지 모드를 자유롭게 혼합해 사용할 수 있다. A모드는 ‘식사’로, 국민급식센터나 지정된 동네식당에서 완조리 식사비를 결제할 수 있고, B모드는 ‘식재료’로, 로컬푸드 매장·전통시장·동네슈퍼 등에서 신선 식재료를 직접 구매할 수 있다. 이렇게 결제된 거래데이터는 식사·식재료 유형, 품목·메뉴코드, 결제 시간과 장소 등으로 세분화되어 공공데이터로 축적되고, 지역별 수급조정과 가격정책의 기초자료가 된다.
국민급식 전남 지정식당은 위생·가격표시·데이터 연동 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모든 결제는 전남 K-푸드 카드로 이루어진다. 지정식당은 지역 식재료 사용, 잔반 감축, 무장애 좌석, 취약시간대 운영 등 ESG 실천 수준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다. 이 구조는 단순한 식당 지원책이 아니라, ‘지역 식당이 공공급식의 한 축이 되는 제도적 참여모델’이다. 조달과 공급 단계에서는 지역 도매시장 내 공공출자 시장도매인이 정가·정시·정량·정품 원칙에 따라 거래를 수행한다.
농민단체는 20대 핵심 품목을 중심으로 계약재배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여기에는 학교·복지·직장·의료급식의 예상 수요를 반영해 생산–조달–공급–정산이 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농민은 안정적 판로를 확보하고, 소비자는 공정한 가격과 품질을 보장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카드 발행 → 지정식당 결제 → 시장도매인 조달 → 계약재배 공급 → 대시보드 공개로 이어지는 ‘원패스 가치사슬(one-pass value chain)’로 작동한다. 이 체계가 완성되면, 국민의 식사는 곧 지역의 경제가 되고, 한 끼의 결제가 국가의 먹거리 데이터로 환류된다. K-푸드 카드는 그렇게 한 장으로 생산·유통·소비·데이터를 잇는 국민급식의 허브가 된다.
‘숫자를 두 배로 키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흩어진 제도와 유통을 하나로 잇는 일’이다. 공영도매시장 안에서 공공급식과 친환경 물류가 만나고, 그 흐름을 데이터가 투명하게 뒷받침할 때, ‘면적 2배’는 비로소 ‘국민의 일상 2배’가 된다. “한국엔 K-푸드 카드가 있다”는 문장이, 정책의 약속이자 현장의 현실로 완성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