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 21개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제33차 APEC 경주 정상회의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특히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이 참석해 세계 경제와 안보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알려져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세계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압도적인 군사 강대국으로 세계에 군림하고 있다. 그들 세 나라 중에서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으로서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과 일본, 한국과 동맹들은 미국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방위 분담을 요구하고 있다.
자고로 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그 나라에 먹히거나 속국이 된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과 너무 가까이 하면 수치를 당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일본도 강대국이고 한때 식민지로 우리를 지배한 나라이지만, 미국이 제어하는 동안은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미국은 지난번 젤렌스키가 트럼프 대통령과 말다툼 중에 튀어나온 바 있듯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지리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나라를 보호받고 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식량과 자원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강대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에 대해 탐을 내고 평택 기지를 소유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터무니없는 영토 욕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우리가 너무 친중하면 먹힐 수 있지만 친미한다고 먹힐 염려는 없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게 미국은 꼭 필요한 동맹이다. 하지만 미국은 원천적으로 동맹이 필요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설령 우리가 저자세를 보이더라도 미국 동맹을 소중히 다뤄야 한다.
개화기 때 김옥균이 미국 푸트 공사의 만류에 불구하고 무모하게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청국의 간섭과 일본의 배신을 불러왔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던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국민 소득이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고 첨단기술과 군사력을 제법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국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중국과 러시아와는 대적할 수 없다. 반드시 미국의 군사적 동맹이 필요하다.
트럼프 정부는 관세 인하 조건으로 대미 3500억 달러의 선불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한국은 지난 세월 동안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극한의 위기를 뚫으면서 창조적 해결과 국민의 단결력을 보여줬다. 한국과 미국, 모두 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한다.
달라진 미국 태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미국은 태생부터 외국 불간섭주의, 즉 먼로주의가 베이스다. 미국의 국제 개입과 인도적 이상주의는 국가이익과 합치될 때는 화산처럼 분출되다가 자국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 서면 갑자기 ‘피식’ 꺼져버린다. 아프간 미군 철수, 그 이전 베트남전 철수가 좋은 사례다. 그래서 미국 외교는 ‘변덕’이요 ‘즉흥적’이란 말로 요약되기도 한다.
※먼로주의(Monroe Doctrine)는 1823년12월2일에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 밝힌 외교방침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간에 상호 불간섭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외교적 고립정책을 말한다.
미국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초기 전쟁 국면에서 유럽 동맹국들의 속을 끓이다가 나중에야 참전했다. 미국은 본시 고국에 진저리를 쳐서 떠난 이민자들이 모여 있기도 하고, 너른 땅덩어리와 풍족한 자원과 인구로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다른 나라들 싸움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계 곳곳에 미군 기지를 두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미국의 힘을 과시하고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싶고 다른 나라들이 우러러보기를 바라는 대국의 심리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 관심은 일종의 대국의 멋, 패션인 것이다. 한국과 일본, 대만, 필리핀, 베트남, 우크라이나, 폴란드, 에스토니아처럼 중국과 러시아, 북한의 위협 속에 놓여 있는 나라의 절박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심리를 알아야 미국을 이해할 수 있다.
트럼프 정부가 한국과 대만을 아시아 방어선에서 제외하는 ‘신애치슨 라인’을 설정하는 새로운 국가방위전략이 회람 중이라고 닛케이 신문이 9월 23일 보도했다. 또 워싱턴포스트는 중국의 대만 점령에 대비해 전 세계의 미군 배치를 재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대북 억지 전략에 심각한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다.
6.25전쟁은 1950년 1월 미국이 한국과 대만을 방어선 밖으로 둔다는 애치슨라인을 발표하는 바람에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었다. 한국인에게 애치슨라인은 악몽 그 자체다. 트럼프의 일부 인사들이 또 그런 생각을 품고 추진하고 있다니 악몽이 재현되려나 하는 걱정을 감출 수 없다. 이래저래 한반도 주변 안보 정세가 요동칠 기미가 보이고 있다. 우리는 한층 국방력 강화에 온 힘을 쏟아야 하겠다.
APEC 경주 정상회의에서 보여줄 한국 외교의 비전은?
이번 APEC 경주 정상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의장국으로서 AI와 인구 문제를 주제로 제안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AI와 인구 문제는 중요한 이슈 임에는 틀림없지만, 좀 평이한 느낌이다. 그 주제들이 꼭 경주 정상회의에서 논의될 만한 핫이슈인지 모르겠다. 기자들의 감으로는 ‘기삿거리’로는 약해 보인다. 전 세계 유수의 기자들이 몰려올 텐데, 그들의 관심을 끌 만한 주제이면 좋겠다는 의미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23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액션 플랜인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를 제안한 바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경주 정상회의에서도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안정 문제에 관한 구상을 강조하고 각국 정상들에게 협조를 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정부로서는 당연히 제안할 만한 주제이지만 뭔가 미진한 감이 있다.
올해 들어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받고 있는 국가 지도자가 있다면 트렴프 대통령이다. 뉴스만 보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난 9월 23일 유엔총회 연설 후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 소셜에서 그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줬던 미온적인 태도를 일거에 불식시키는 발언을 했다. 우크라이나에게 영토 양보를 촉구해 왔던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우크라이나가 영토 전체를 수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러시아를 ‘종이 호랑이’라고 비하했다.
세계 뉴스를 몰고 다니는 트럼프 대통령이 경주를 방문한다. 그를 붙잡아 두고 감동을 줄 만한 주제는 없는 것일까. 우리 정부가 시의적절한 글로벌 주제에 상상력과 창의성 있는 외교 방략을 던져볼 순 없을까. 중견국, 혹은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한국이 이제는 국제 무대에서 회원국들의 공통 현안에 관한 해법을 제시하고 함께 실현해 가는 외교를 펼칠 때다.
이번 APEC 경주 정상회의의 의장국으로서 이와 같은 기획 외교를 의욕적으로 전개할 절호의 기회라고 본다. 기획 외교의 주제로 가장 근접하게 떠오르는 아이템은 자유무역과 국제협력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대결 격화, 미국의 관세 정책은 자유무역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자유무역은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도 아니고 무역 상대국 모두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자유무역의 혜택을 받았다.
트럼프 정부의 과격한 관세 정책을 유발한 역사적 연원을 살펴보면, 중국을 세계의 공장을 만들어 준 미국 자신에게 귀책 사유가 있다. 지난 40여 년 간 미국이 중국에게 과도하게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고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며 미국의 일부 층, 즉 월가와 빅테크만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반면에 이러한 왜곡된 양자 관계로 인해 자국 내의 제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엄청난 타격을 받으며 불평등을 자초한 원인이 가장 크다. 관세 폭탄이란 게 따지고 보면 중국에게 빰 맞고 다른 나라들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중국경제가 지금 겪고 있는 과잉생산 문제도 혼자서 세계 공장 노릇하다가 세계의 수요가 갑자기 하락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시장 자본주의는 종국에는 과잉생산을 잘 관리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경제도 극호황으로 돌아갔다가 무너져서 장기간 잃어버린 세월을 보내고 이제야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는 듯하다.
폴란드는 지난 9월 하순 중국의 대유럽 철도 물류의 90%를 수송하는 벨라루스 동부 국경을 약 2주간 폐쇄했다가 개방한 적이 있다. 국경 일시 폐쇄 사유는 러시아 드론의 폴란드 영공 침범, 러시아-벨라루스 연합 군사훈련 등 안보 위협을 들고 있다. 하지만 폴란드는 공개적으로 밝힌 바대로 중국이 러시아에 압박하는 수단으로 국경 폐쇄를 일시 단행한 것이다.

자유무역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보고 있는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계속해서 러시아 편을 들고 있는 상황은 일종의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폴란드의 국경 폐쇄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음을 알고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루빨리 종식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자유무역을 위협하는 나라가 세계에서 1, 2, 3위의 군사 강대국이라는 점이 참으로 서글프다.
자유무역이 위기를 겪고 있는 데에는 진정한 상호존중과 호혜의 ‘국제협력’이 없었던 이유도 크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간혹 불상사가 없진 않았으나 그만한 대규모 사업에서 사고가 없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본다.
미국은 제2차 대전 후 마샬플랜으로 폐허가 된 유럽과 일본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한국도 6.25전쟁 이후 근 20년에 걸쳐 오랜 기간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다. 그러던 미국이 국제협력으로 얻은 것보다는 잃은게 많다는 ‘피해 의식’을 가지게 된 듯하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 7월 세계 최대의 원조 구호기구인 국제개발처(USAID)를 폐쇄했다. 폐쇄 이유는 방만한 운영과 비효율이었다. 개발 시대 한국은 국제개발처의 도움으로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었다. 21세기는 과거와 같이 선진국이 후진국에게 시혜를 베푸는 국제협력 및 원조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 상호존중과 호혜를 기반으로 한 국제협력의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한국은 지구촌 국가 중 피원조국에서 원조국으로 전환한 유일한 나라이다.
한국은 자유무역의 이상이 흔들리고 있는 현 상황에서 국제협력과 자유무역을 결합한 새로운 무역 구상을 제시해 볼 수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9월 22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경제공동체를 구축하면 미국과 EU, 중국에 이은 세계 4위의 경제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정부가 최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검토하기로 한 데 대해 “CPTPP 가입도 좋지만 한-일간에는 느슨한 연대가 아닌 EU 수준의 완전한 경제통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이전부터 한-일간 경제블록을 강조해 왔다. 한-일간의 경제 블록화는 매우 현실성이 있으며, 갈수록 통상환경이 불확실하고 이합집산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의 적극적인 추진이 필요해 보인다.
한-일간 경제통합은 일본보다는 한국 정부에서 적극 나서야 이뤄질 사안이다. 보수당 정부보다 진보적인 이재명정부가 실용주의적 사고로 접근하면 일부 국민들의 저항감을 완화해 현실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FTA를 성사시켰듯이 말이다.
일본경제는 이제 잃어버린 경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 엔화의 불안정성을 놓고 왈부왈부하는 분석가들이 있는데,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는 격이다. 일본경제의 요즘 모습은 전반적으로 과잉생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중국경제와는 대비된다. 불활실성 시대에 확실한 경제 동반자를 만드는 것은 그 어떤 국내 경제정책보다 효과적이다.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는 현재 물밑 접촉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회담 이전에는 사실상 별로 할 게 없다. 따라서 APEC 경주 정상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무역과 국제협력 관련해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어젠다를 제안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