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국한된 '간첩죄'의 빈틈… 韓, 제3국 '안보·기술 위협' 무방비

  • 등록 2025.05.01 0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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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몰래카메라·무인정보 교환 ‘데드 드롭’까지 동원 韓 기밀수집
적국이 아닌 中...전투기·국정원 촬영하다 적발 중국인 간첩죄 미적용
美 '스파이법' 최대 15년·英 종신형... 전문가 "턱없이 낡은 법 고쳐야"

 

 

최근 중국 국적의 인물이 우리 군 현역 병사를 포섭해 군사기밀을 유출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국의 국가안보 법체계에 치명적인 허점이 드러났다. 이 인물은 몰래카메라와 무인 정보 교환 방식인 ‘데드 드롭’까지 동원하며 정교한 방식으로 기밀을 수집했지만,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에 그쳤다. 현행법상 간첩죄는 적국으로 명시된 북한에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법적 공백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경기 평택 오산 미군기지 인근에서 전투기를 촬영하다 적발된 중국인들이 연이어 풀려나고, 10대 청소년까지 군 기지를 무단 촬영해도 처벌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무전기까지 소지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중국 공안과의 연계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현행법상 ‘중국’은 간첩죄가 적용되는 적국이 아니기에, 이들의 행위는 군사시설 보호법 위반으로만 간주되고 있다. 

 

이처럼 ‘적국’에 한정된 간첩죄 적용 범위는 첨단기술 유출, 군사정보 침투, 경제안보 위협 등 현대적 첩보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로 지적받고 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유일하게 간첩죄 적용 대상을 북한에만 한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글로벌 정보전 시대에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 ‘국가안보 구멍’ 드러난 간첩죄… 제3국 스파이엔 속수무책

 

지난해 11월, 한 중국인이 드론을 이용해 서울 내 국가정보원 청사를 촬영하다 경찰에 적발됐다. 올해 1월에도 제주국제공항 상공에서 드론을 띄워 촬영을 시도하던 또 다른 중국인이 검거됐다. 두 사건 모두 보안 시설에 대한 사전 승인 없는 촬영으로, 단순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위반으로만 처벌이 가능했다. 설령 촬영 의도가 불순하더라도 ‘적국’과의 연계를 입증하지 못하면 간첩죄 적용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군사기지법에 따르면 군사시설을 허가 없이 촬영하거나 접근할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그치는 수준이다. 반면 형법상 간첩죄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최소 7년 이상 징역형이 가능하지만, 이는 전시에 적국을 위한 첩보 활동에 한정돼 있어 중국 등 제3국을 위한 스파이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처벌 수위 자체가 낮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작년 7월에는 국내 방위산업체 기술자료를 외국 기업에 유출한 혐의로 영국 방산업체 한국지사장 A씨와 국내 방산기업 기술본부장 B씨가 나란히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형량은 각각 징역 2년 6개월, 1년 6개월에 그쳤다.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만 인정됐을 뿐, 외국 기업 이익을 위한 첩보 활동임에도 간첩죄 적용은 불발됐다.

 

이에 따른 산업 피해도 점점 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2022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산업기술 유출로 인해 발생하는 국내 기업의 피해금액은 연 평균 약 56조원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경찰에 적발된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은 총 27건으로 중국(20건), 미국(3건), 일본, 베트남, 독일, 이란 등에 각각 1건 유출됐으며 특히 국가핵심기술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기전자 분야에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 美·英·中은 기술유출도 간첩죄… 韓은 '낡은 법'에 국익 줄줄 샌다

 

최근 국제사회는 전통적인 군사적 충돌을 넘어선 하이브리드 전쟁시대에 접어들었다. 군사력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격, 정보전, 경제적 압박, 심리전 등 다양한 비군사적 수단이 동원되며, 특히 국가의 핵심 산업기술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심화됨에 따라 각국은 자국의 핵심 기술 유출을 단순한 경제 범죄가 아닌 국가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고, 이를 강력히 처벌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1996년 제정된 '경제스파이법(Economic Espionage Act)'을 통해 외국 정부나 기관의 이익을 위한 영업비밀 절도에 대해 최대 징역 15년 또는 500만 달러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병과주의'를 채택해 복수 범죄에 대해 형량을 합산할 수 있어, 실형 선고가 한국보다 훨씬 무겁다. 2022년에는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인사가 미국 항공우주기업의 기술을 탈취하려다 적발돼 총 4개 혐의로 20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영국은 국가안보법과 더불어 국가안보투자법을 통해 산업기술 보호를 강화했다. AI, 첨단소재, 로봇 등 17개 전략기술 분야에 대해 외국인 인수 시 정부의 심사와 사전 신고를 의무화했으며, 산업스파이 행위에 대해 종신형이나 무제한 벌금형까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본 역시 2022년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통해 핵심 기술과 기반시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고, 외환법 개정으로 외국인 연구자 활용 시 사전 허가를 의무화하는 등 대응을 고도화하고 있다.

 

중국은 국가안보법과 반간첩법을 통해 기술과 데이터 유출을 간첩행위로 규정하며,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정보에 대한 통제를 대폭 강화했다. 이번 개정안은 간첩의 범위를 사이버 영역까지 확대하고, 조사와 처벌 권한을 강화해 기술 유출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다.

 

반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반도체, 바이오, 방위산업 등 다양한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상당히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최근 기술유출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고 양형이 강화되는 추세지만, 실제 법정형에 비해 선고 형량은 징역 1~2년 또는 집행유예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기술 유출로 얻는 이득이 적발 시 손해보다 훨씬 크게 나타나, 범죄를 억제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고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 이어진다.

 

◇ 기술유출 방치, 국가안보 위협… “산업보안 특별법 제정 시급”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간첩의 활동과 입법적 대응’ 토론회에 나온 전문가들은 “하이브리드 전쟁시대, 보이지 않는 첩보와 기술 유출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지금의 간첩죄 규정으로는 더 이상 국가를 지킬 수 없다”며 강도 높은 법 개정을 촉구했다.

 

 

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현행 형법상의 간첩죄는 1953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며 “이미 현실화된 정보전, 경제간첩 활동에 대응하기에는 턱없이 낡은 법”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국익을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책임은 국가 권력에 있다”며 “국회는 시대 흐름을 반영해 간첩죄를 전면 개정하거나, 산업·경제 영역에 특화된 특별법을 신속히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행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한 간첩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 ‘적국’은 대법원 판례상 북한에만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러시아 등 제3국을 위한 첩보 활동은 명백한 안보 위협임에도 불구하고 간첩죄 적용이 불가능한 법적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다.

 

최근 간첩죄 적용 범위를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하는 형법 개정안이 법사위에서 통과됐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입장을 바꿔 ‘간첩죄’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일각에서는 “간첩죄 개정이 오히려 간첩 활동을 제약하기보다 보장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중국 등 외국 정부가 배후로 지목되는 산업기술 유출 사건이 반복되는 가운데, 관련 법률의 부재는 대한민국의 경제 안보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보라 박사(국가안보전략연구원 하이브리드위협연구센터)는 "경제 안보와 산업기술 보호를 넘어서 이제는 ‘연구 안보’ 개념까지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박사는 “기존의 경제 안보 논의가 지나치게 경제성과 규범 중심에 머물면서 정작 국가 안보와의 연계성은 약화돼 있다”며 “신기술 개발 초기 단계부터 연구 안보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위한 국민적 인식 제고와 입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간첩죄가 북한 등 적국에만 국한돼 있는 현행 법 체계는 제3국을 통한 기술 유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은 물론 연구관련 법령에도 안보적 요소를 포함시키는 법·제도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다수 전문가들은 “국가의 존립 기반은 이제 총이 아니라 기술과 데이터”라며 “경제 주권을 지키는 것은 곧 국가 안보를 수호하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더 이상 미봉책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한 만큼, 간첩죄 전면 개정과 산업보안 특별법 제정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은주 기자 kwon@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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