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치는 ‘잘 살기 위해’ 고안한 인류 최고의 문화이자 수단이다. ‘자치’는 ‘민주’로 대변되며, ‘민주’는 곧 ‘경제’로 해석된다. 삼단논법에 이해 자치는 곧 경제로 귀결된다. 결론적으로 ‘잘 살기’ 위해 자치를 하는 것이다.
◇지방분권형 개헌과 주민자치국가를 향한 길
한국 사회가 당면한 위기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경제 불균형, 수도권 집중, 지방 소멸을 말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가 놓여 있다. 바로 ‘자치의 부재’다. 더 명확하게는 ‘자치권의 한계’다. 지방은 행정의 말단 수용처로 기능하고 있으며, 지역 주민은 정책의 객체일 뿐 주체가 아니다.
구호에 그치고 있는 자치가 우리의 현실이다. 말로는 지방자치를 수십 년 외쳐 왔지만, 진정한 자치가 무엇인지, 자치가 왜 경제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참 자치’의 개념을 되새기고,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주민자치형 국가’, 곧 스위스 모델의 지방분권형 헌정 질서임을 제안한다. 스위스가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다. 스위스 모델을 벤치마킹하자는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참 자치야말로 지속 가능한 경제의 토대이며, 그 출발은 헌법 개정이다.
◇중앙집중형 국가의 한계
대한민국은 형식상 지방자치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집중형 국가다. 예산, 법률, 인사, 세제 등 대부분의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어 있다. 기초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은 주민을 대표하지만,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다. 지방이 아무리 좋은 정책 아이디어를 갖고 있더라도 법적 근거가 없으면 불가능하고, 재정이 따라주지 않으면 탁상행정에 그친다. 더불어 주민이 겪는 일상생활 영역도 광역행정에 종속되어 있다.
지방 경제도 마찬가지다. 기업 유치는 중앙의 규제나 재정에 발이 묶이고, 혁신은 권한 이전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지역 차원에서 단독으로 시도되기 어렵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구호는 공허하다. 권한과 책임이 없는데 어떻게 자립을 기대하겠는가. 자주적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손과 발이 묶여 있는 것과 다르지 않고, 책임 주체도 모호함을 의미한다.
자치의 본질은 ‘권한의 분산’과 ‘책임의 주체화’에 있다. ‘자치’는 단지 행정 단위를 지방으로 이관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 지역사회의 주체로 나서는 구조를 뜻한다. 즉, ‘누가 결정하고 책임지는가’의 문제다.
자치란 결국 주민이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체계를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정부가 입법권, 재정(조세)권, 집행권, 조직권 등을 일정 수준 보유해야 한다. 하지만 현행 헌법과 지방자치법은 지방정부를 중앙정부의 하위 파트너로 취급하고 있다.
이처럼 권한이 불충분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지역 리더가 역량을 발휘해도 제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이 바뀌어야 한다. 헌법 제117조와 제118조가 상징적으로 명시하는 ‘지방자치의 보장’이라는 선언적 문구를 넘어서, 구체적인 권한 이전과 주민 참여의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스위스 모델이 주는 시사점
스위스는 단지 알프스가 있는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주민자치형 국가다. 스위스는 연방헌법이 보장하는 지방분권 체계를 기반으로, 26개 주(canton)와 2,600여 개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자율권을 가진다. 가장 놀라운 점은 국가의 1년 예산 중 약 60% 이상이 지방에서 집행된다는 사실이다. 중앙은 ‘규범’과 ‘기본 인프라’를 담당할 뿐, 대부분의 정책은 지방에서 구상되고 시행된다.
또한, 주민들은 지역 교육정책, 세율, 복지, 도시계획 등 수많은 사안에 대해 직접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연방 정부가 제안한 법률조차도 주민의 서명이 일정 수준 이상 모이면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 이처럼 철저한 직접민주주의가 경제와 행정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스위스는 이렇게 ‘지역주도 국가’를 통해 혁신과 신뢰를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하는 정부 신뢰도, 혁신성, 경쟁력 순위에서 스위스가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는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형 분권국가를 위한 조건 _ 헌법 개정
한국도 지금이 기회다. ‘자치분권 2.0’을 넘어 ‘자치주권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 시작은 헌법 개정이다. 최근 제헌절을 맞아 이재명 대통령과 우원식 국회의장이 만나 ‘개헌’에 대해 상호 재차 확인했다는 언론보도를 접했다. 눈물 날만큼 반가운 소식이다.
헌법에 지방정부의 고유 권한 명시하기를 바란다. 지방자치단체가 국가의 하위 기관이 아니라, 독립된 헌정 주체로 기능하기 위해선 조세권·입법권·행정(집행)권·조직권의 원칙적 부여가 필요하다. 예컨대 기본세율은 국회가 정하되, 지방정부가 일정 범위 내에서 탄력세율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주민자치의 헌법상 원칙 확립이 필요하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핵심은 주민참여다. 지방정부의 주요 정책은 주민투표, 주민발의, 주민소환 등 직접민주제 수단을 통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이 역시 헌법에 명시해야만 실효성을 가진다.
자치입법권 확대 및 기관구성 다양화는 필수요건이다. 지방의회가 단순히 예산을 승인하고 감시하는 기능에 그쳐서는 안 된다. 조례의 제정범위를 확대하고, 기관구성도 주민이 선택할 수 있도록 헌법상 근거를 명확히 해야 한다. 2021년 개정 지방자치법 제4조는 좋은 출발이지만, 헌법적 보완이 없다면 한계가 분명하다.
◇자치가 곧 경제
지방분권은 단지 정치나 행정 개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경제 문제다. 지역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갖게 되면, 기업 유치 전략, 일자리 창출, 복지정책 설계 등을 지역 특성에 맞게 시도할 수 있다. 중앙의 획일적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실험이 가능해지고, 성공 모델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작동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지역마다 ‘잘 살기 위한’ 다양한 실험이 펼쳐질 것이다.
또한, 주민이 정책결정에 참여함으로써 정책의 집행력과 정당성이 강화된다. 이는 곧 행정의 낭비를 줄이고, 세금의 효율적 집행을 가능케 한다. 정치적 신뢰 역시 높아진다. 자치가 제대로 작동할수록 지역의 생산성과 창의성도 동반 상승할 수밖에 없다. 결정은 곧 책임으로 이어진다. 더불어 주민들의 주체적 의식 또한 성장하게 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참 자치란 단순한 행정 위임이 아니다. 지역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치가 가능한 헌정 구조부터 다시 짜야 한다. 헌법 개정을 통해 자치의 틀을 갖추고, 지방자치법·지방재정법 등 일련의 후속 법률을 정비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와 국회는 헌법 개정 논의를 조속히 개시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수도권 일극 중심 사회의 균열을 온몸으로 겪고 있다. 정치, 경제, 복지, 문화 모두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건강한 국가 구조가 아니다. 진정한 자치는 지역의 생명력을 회복시키고,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다. 스위스처럼,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참 자치가 곧 경제라는 사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