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일본 쌀 파동과 미국 관세정책은 한국에 농업정책의 대전환이라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2024~2025년 일본은 기후 악화로 쌀 수확량이 급감하고 정부의 쌀 감산 정책과 가격조절 실패가 겹치며 소비자 가격은 오르고, 외식업계·식품가공업계는 쌀 공급 부족으로 비상상황을 겪고 있다. 일본은 자국민의 주식(主食)인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하지 못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쌀 파동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도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예고된 현실이다. 한국도 쌀을 포함해 채소·과일·축산물 등 다수 품목에서 생산 기반 약화, 수급 불안정, 가격 급등락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기후위기와 고령화로 인해 생산량 변동이 커지고, 정부의 수급관리 정책은 단기 물가 대응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불리하면 무조건 재협상이라는 접근을 택한다. 이는 WTO나 FTA 같은 다자·양자 협정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흔들고, 국제 무역질서를 '힘의 균형' 중심으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이다. 무역의 대응 전략은 외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나라 내부의 산업구조와 자립 기반이 약하다면, 협상 테이블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특히 농업처럼 국민 생활과 직결된 분야에서는 더 그렇다.
한국은 관세정책에 흔들리지 않는 농업의 내재적 힘, 즉 자립성과 유연성을 키우는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농업정책은 시장 대응 중심이었다. 가격이 떨어지면 보조금을 주고, 태풍이 오면 재해복구비를 책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무역 전쟁은 기후와는 다르다. 위기는 더 광범위하고, 대응 시간은 훨씬 짧다. 한국 사회는 지금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지려는 순간에 서 있다. 대한민국의 농업은 지금 ‘기본’을 잃고 있다. 이제는 선제적이고 전략적인 농업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농업의 공공성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단순한 수입 대체가 아니라, 농업을 국가 전략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 다시 말해 기본농업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농민의 생산을 단순한 생계가 아닌 국민의 식량주권 실현으로 인정하는 틀이 필요하다. 식량을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는 독립된 국가라 할 수 없다.
기본농업(Basic Agriculture)은 국민 누구나 접근 가능한 식량공급체계를 구축하고, 농업이 시장 논리를 넘어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공공인프라로 기능하도록 설계하는 체계다. 기본농업은 단지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적정한 생산 기반을 유지하고, 농민이 안정적으로 지속가능한 농업을 영위하도록 지원하며, 국민 모두가 기본적인 식량에 접근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해 정권이 바뀌어도, 국제질서가 요동쳐도 흔들리지 않는 농업 방어선을 만들 수 있다.
통상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는 트럼프의 무역압박에도 멕시코가 굴복하지 않은 이유로 ‘자주적 원칙과 직접 협상’을 꼽는다. 기본농업은 이러한 국가 협상력의 뿌리다. 무역 전쟁은 예고 없이 닥치고, 식량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농업은 더 이상 뒷순위 정책이 아니라, 가장 앞줄에서 국민의 삶을 지키는 전략 산업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어떤 농업정책을 설계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식탁이 달라진다.
2023년 기준, 대한민국의 전체 곡물 자급률은 약 20%에 불과하며, 쌀만 자급률 약 90%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쌀의 소비량은 줄고 있고 대체 곡물의 수입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식량 수입 문제가 아니라, 국민 생존과 사회 안정을 지탱하는 기반이 붕괴되고 있다는 경고다.
농촌도 무너지고 있다. 전체 농가 중 65세 이상 고령 농업인의 비율은 47%를 넘고, 청년 농업인은 1.5% 수준에 불과하다. 농가소득은 도시가구 평균의 65% 수준이며, 농지는 투기 자산화되고, 농촌 지역은 소멸의 벼랑에 있다. 이러한 위기는 단지 농업의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기본권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는 구조적 신호다. 그 경고를 우리는 이미 두 개의 법칙에서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다.
리비히와 톨스토이, 서로 다른 경고로 말한 동일한 진실이 있다. 19세기 독일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식물의 생장을 좌우하는 법칙을 제시했다. 식물에 필수적인 무기양분 중 가장 결핍된 성분이 전체 생장을 제한한다는 것이 바로 ‘최소량의 법칙’이다. 다양한 통나무로 만든 나무 물통은 가장 짧은 통나무 높이만큼만 물을 담을 수 있다. 전체를 제한하는 것은 가장 부족한 요소라는 것이다. 이 원리는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식량이 부족하면 교육도, 건강도, 민주주의도 유지될 수 없다.
가장 부족한 고리가 전체를 결정짓는다. 이와 유사한 구조적 통찰은 톨스토이의 문학에도 등장한다. 그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고 썼다. 성공한 시스템은 모든 요소가 충족되어야 하며, 하나라도 결핍되면 실패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다. 이 두 법칙은 공통적으로 ‘시스템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무너진다’는 진실을 경고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 고리는 ‘기본농업’이다.
선진국은 왜 ‘기본농업’을 국가 전략으로 삼았는가에 대해 고뇌해야한다. 오늘날 선진국은 농업을 시장에만 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농업을 공공성과 국가 전략의 핵심 인프라로 규정하고, 기본농업의 개념을 정책화하고 있다.
프랑스는 2014년부터 ‘국가식량영양계획(PNAN, Programme National pour l'Alimentation)’을 통해 공공기관 급식에 지역 친환경 농산물을 일정 비율 이상 조달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농업의 지속성을 제도적으로 보호한다. 덴마크는 유기농업 육성 계획을 국가 정책으로 수립하고,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식재료의 유기농 비율을 9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이로 인해 청년농 유입이 확대되었고, 농업의 탈탄소 전환도 가속화되었다.
이처럼 농업은 단지 생산 활동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회복력(resilience)을 설계하는 기반이다. 회복력이란 위기 상황에서도 사회가 지속 가능하고 재구성 가능한 능력을 말하며, 이는 기본농업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 기본농업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다. 식량안보, 기후 대응, 청년 일자리, 지역 균형, 먹거리 복지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회의 기본 인프라다. 이제는 국가가 식량권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농업을 공공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공공급식 계약재배 확대, 청년농 지원, 지역푸드플랜, 농민기본소득 도입은 기본농업 복원의 핵심 전략이다.
리비히와 톨스토이가 주는 교훈은 “전체는 가장 약한 고리가 규정한다.”
현재 일본 쌀 파동은 한국의 미래가 될 수 있다. 지금 그 약한 고리를 복원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물이 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기본사회로 가는 길은 기본농업에서 시작된다. 지금이 바로 그 길을 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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