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국가’와 아젠다파이터(agenda fighter)

  • 등록 2025.03.21 09:3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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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논란이 갈수록 어지럽다. 민감국가 지정 소식이 나오자 최근 수년 간 한국에서 제기된 핵무장론을 지목하면서 미국이 경고 의미로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발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특히, ‘민감국가’가 아니라 ‘기타 지정국가’에 포함됐다고 주장하면서 오보라고 주장하거나, 미 에너지부가 핵무장론과의 관련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없다고 반박하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궤변에 가깝고 본질을 흐리는 부작용도 유발한다. 보다 큰 그림에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핵무장론은 미국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며, 현실적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주장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무장론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은 핵무기 비확산 분야에 종사하는 미국 전문가들의 우려감을 자극하고 한미 관계를 불필요하게 경색시켜왔다는 점에 대해 깊은 성찰과 함께 자숙하는 태도를 보여야할 시점이다.

 

원자력 기술 분야 전문가 사이에서는 몇 개월 전부터 미국이 한국의 핵무장론 득세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이번 에너지부 조치 역시 이런 배경 속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상식적이다. 에너지부가 민감국가로 지정한 이유를 공개적으로 핵무장론 때문이라고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 액면 그대로 믿고 핵무장론과 민감국가 지정이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저 순진한 반응일 뿐이다.

 

확고한 입장을 가진 사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외교적 수사로 해석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에너지부는 핵무기 비확산 문제에 대해 실무적으로 담당하는 부서고, 민감국가 목록은 비확산 체제를 유지한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요소다. 핵비확산 및 핵기술 유출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고려하면 핵무장론이 빌미가 됐을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 단순한 보안 문제 아니다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것이 보안 문제 때문이고 정치나 정책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군색한 논리다. 보안 규정 위반이 문제라면 규정을 위반한 당사자를 징계하면 될 일이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대상으로 조치가 내려졌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보안 문제가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외교·안보 정책 차원의 고려가 반영된 결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히 한미 관계 역사를 돌아볼 때 미국이 한국을 핵무기 개발에 대한 강한 의사를 가진 나라로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개발 시도는 한미 관계에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측근의 총격으로 사망했지만, 그 시점이 미국과의 심한 갈등 이후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한국 국가 기관 소속의 연구원들이 불법적으로 플루토늄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실험을 진행한 사실이 적발된 사실이 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2004년 국제원자력기구 IAEA로부터 굴욕적으로 강도 높은 사찰을 받았다.

 

1970년대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 중단 이후 차근차근 국제 사회 신뢰를 얻었던 한국은 다시금 강대국들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처지로 바뀌었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몇 년간 증폭된 핵무장론은 단순한 학술적 논의 수준을 넘어서 미국과 국제사회에 실질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2023년 1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미국 정책 당국자들은 충격을 받았고, 핵무장론 관련 한국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했는데, 핵무장론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초현실적인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현실성이 없고 국가 안보에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는 핵무장론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아젠다파이터’의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거나 기존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세력의 노력이 존재한다. 이런 종류의 정책 관철 노력을 이슈파이팅(issue fighting)이라고 하고, 그런 노력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이슈파이터(issue fighter)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슈파이팅은 공공 이익 증진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슈파이터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내용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아젠다파이터(agenda fighter)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아젠다파이터란 개인 명성을 쌓기 위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고, 오히려 정책 관철을 추진하면 부작용만 커지는 과제를 추진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최근 한국에서 핵무장론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와 정치인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높은 수준의 지식인들로 핵무장론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해서 개인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국가 이익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언젠가 정당한 기회가 오면 대한민국도 핵무장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묵묵히 비핵화 원칙을 지키면서 국제 사회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온 조용한 애국자들의 소망을 속절없이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중에서 핵무장이 가능한데, 핵무장을 하지 말자고 주장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핵무장을 주장하는 것은 손실만 초래하므로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방법의 하나로 핵무장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선결 과제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길은 비핵화 원칙을 준수하고,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NPT 체제, 즉 핵비확산 체제는 핵보유국 5개국이 기득권을 갖는 불공평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한국만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비핵국가들이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한미 동맹이 유지되는 한 미국의 확장억제 프로그램이 작동하며, 이는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것과 유사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핵무장론자들은 미국이 확장억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동맹의 신뢰성 문제는 실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사안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확장억제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순간, 확장억제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확장억제는 한미동맹이 견고하게 유지되는 한 작동한다고 신뢰하는 태도가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미동맹이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답변은 매우 견고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확장억제가 작동하는 것이고, 핵무장론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핵무장론이 확산되면, 한미 동맹이 흔들리고, 확장억제는 흔들리고, 안보 위협은 더 커진다.

 

대한민국은 아젠다파이터들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주장에 휘둘리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나라다. 핵무장론은 백해무익하다. 비핵화 원칙과 평화적 핵운용체제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안전보장에 유리하고, 미래에 국제 질서 변화와 더불어 어떤 기회가 온은 시점에서 핵무장 가능성을 살릴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현실적으로 결정적인 선행 과제라는 점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왕선택 서강대 대우교수

편집국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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