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출근하면서 빵집을 지나칠 때 아침부터 구워지는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촉박한 시간인데도 빵집으로 향하는 경우가 있다. 빵은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역사가 긴 음식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빵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부풀어 오른 빵의 시작
고대 문명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이집트 문명이다. 다른 민족들보다 우수한 문명인 고대 이집트 문명에 한 몫을 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빵이다. 이집트 시대에 다른 민족들도 빵을 먹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부풀어진 빵이 아니라 납작한 빵이었다. 죽이나 납작한 빵을 먹고 살았던 다른 민족들에게 어느 날 부풀어 진 빵 굽는 기술을 보여준 이집트인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죽과 납작한 빵은 몇 백 년 동안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당시 스위스 사람들은 뜨거운 돌에 곡식을 굽거나 물을 넣어서 죽처럼 끓여먹었다. 빵을 만들 때는 뜨거운 불 위에 죽 그릇을 매달아 놓거나 뜨거운 돌 위에 죽을 얹어서 단단해질 때까지 구웠는데 이렇게 되면 유통기한은 늘어났지만 대신에 맛이 없었다.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빵을 먹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인 플리니우스는 ‘로마인은 오랫동안 빵이 아니라 죽을 먹고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스위스 민족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듯이 다른 민족들도 음식의 부패를 피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반면 이집트인은 밀가루 반죽이 부패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기뻐했는데 이것이 발효의 발견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조금 부패하고 시큼해진 반죽을 구우면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다른 음식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굽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숯불로는 해결되지 않았고 오븐에서 구워야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집트에서 최초의 오븐이 탄생한다. 이집트인들은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고깔 모양의 원통을 만들었고 안에는 평평한 판으로 칸막이를 한 다음 아래칸은 화구를 만들고 위칸은 넓게 하여 빵을 올려놓을 곳과 가스 배출구를 만들었다.
그들은 빵을 굽기 전에 반죽에다 소금을 뿌리고 다시 한 번 반죽을 해서 오븐에 넣어서 구웠다. 물론 이집트인들이 빵을 만들 때마다 새로 반죽을 만들어서 발효를 시키고 빵을 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새 반죽에 발효가 된 반죽을 심어서 빵을 만들었는데, 예를 들면 이미 시큼해져 발효가 된 반죽 한 조각을 떼어내 보관하였다가 새로운 반죽에 넣어서 반죽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효과가 입증되고 난 다음 이집트인들은 집집마다 이 번식력 있는 반죽을 소중하게 보관했다.
화폐 기능을 하는 빵
빵은 이집트인들에게 식량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들이 납작한 빵을 먹고 있을 때 ‘우리는 부풀어진 마술 같은 빵을 먹는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가지고 있는 빵의 개수는 부를 의미했고 오븐은 실질적인 화폐 주조공장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수백 년 동안 빵은 급여로 지급되기도 했다.
농민은 대개 하루에 빵 3개와 맥주 2병을 받았다. 고대 이집트에서 학생들에게 예절을 가르치는 이집트 책에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빵을 나눠주지 않으려거든 자신도 먹지 마라’는 구절이 있다. 빵이 화폐 기능을 하면서부터 빵을 나눠주지 않는 악행이 발생하기도 했다. 여기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소개한다. 람세스 4세 때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인데 지방 파견근무를 했던 노동자들은 기름과 맥주를 받았지만 빵은 받지 못하자 파업을 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에도 빵을 받지 못하자 계속 일을 하지 않았고 테베스에 대표인을 보내 탄원을 했다. 테베스에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동안 받지 못했던 빵을 지급해 주었다.
중세 시대의 제빵사
길드라는 것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도 나오는 길드는 쉽게 말해 장인들의 모임이다. 장인들이 길드를 만든 것은 로마제국 후기부터 시작되었다. 게르만족이 침공하는 과정에서 길드는 없어졌다가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 다시 부활되고 확산되었다. 도시의 길드 중에 가장 오래된 길드는 제빵사 길드였다. 로마제국 당시 제빵사는 국가 관료였다. 독일의 보통법전인 ‘작센슈피겔’을 찾아보면 제빵사를 죽인 사람은 일반 살해점보다 3배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규정 되어있다.
중세 시대 때 제빵사의 삶은 어떠했을까? 이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제빵을 할 때 사용했던 기술, 도구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들은 대부분 도시에 거주했고 시의원이 될 자격이 있었다. 제빵사가 되는 길은 어려웠다. 짧은 견습 기간을 마친 뒤도제 수업을 받아야 했는데 2, 3년이 걸렸다. 이 수업을 다 받으면 수료증을 받고 직급 높은 장인이 되었는데 장인이 된 후에는 3년, 5년 동안 여행을 하며 다른 지역의 문물과 새로운 제빵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서 자신이 어디를 여행했고 무엇을 배웠는지 세세하게 기록한 다음 제출하고 제빵소에 자리가 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직업의 특성상 제빵사들의 건강은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뜨거운 오븐 앞에서 장시간 서서 일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밤샘 작업이 불법이었지만 제빵사만큼은 예외였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빵을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렇게 하루 14시간, 18시간 노동은 제빵사들에게 일반적인 일상이었다. 이들은 늘 피곤에 쌓여 있었고 가난에 시달렸으며 식사시간이 불규칙했다. 이들은 대부분 제빵소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밀가루 분자를 계속 들이마셔야 했다. 이것이 나중에 천식이나 기관지염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제빵사를 쟁드르(geindre), 즉 기침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나폴레옹은 빵 때문에 망했다?
나폴레옹은 전쟁 중에 병사들의 빵을 무척 귀하게 여겼다. 프랑스 병사들의 빵은 어떤 나라 병사들의 빵보다도 품질이 좋았는데 빛깔이 좋고 단단했으며 탄력 있고 껍질이 얇았다. 그 안에는 작은 구멍이 촘촘히 있었는데 밀과 호밀을 2:1로 섞고 밀기울의 20%가 제거된 빵이었다. 그래서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 먹어도 좋을 정도로 품질이 괜찮았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무너진 것은 추위보다 빵 부족이 더 컸다는 소문이 있다. 프랑스가 패하기 전 1807년 황제는 ‘빵만 충분했다면 러시아를 쳐부수는 것은 아이들 장난인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군대가 너무 빨리 진격한 나머지 빵을 실은 마차들이 미처 그 뒤를 따라오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빵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말고기와 말의 피를 마시며 연명했는데 프랑스 병사들이 패배하고 긴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을 겪으면서 사람 사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빵을 보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빵 한 입을 위해 살인까지 벌어졌고 호두만한 크기의 구운 감자 3개를 가지고 전 중대가 싸움을 벌였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MeCONOMY Magazine December 2014
Copyright @2012 M이코노미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