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최근 화제가 된 국내 게임업체 창업자의 막대한 이혼 위자료 사건을 거론했다.
“판결액이 2조 원이라니,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액수가 한 사람의 손에서 감이 잡히지 않는 단위로 오가는 중이야. 우리 사회가 확실히 1%대 99%로 갈라져 버렸어. 허리 구실을 하던 중산층은 이미 사라진 것 같아...”
말끝을 흐리며 씁쓸히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난 9월 18일 자 신문에는 OECD의 새로운 중산층 기준이 보도되었다. OECD는 균등화 가처분 소득 중윗값(3744만 원)의 75%에서 200% 사이에 속하는 가구를 소득 기준 중산층으로 정의했다. 이를 연 소득으로 환산하면 1인당 2808만 원에서 7488만 원이다. 가구원 수로 나누면 1인 가구는 월 234만~624만 원, 3인 가구는 월 405만~1081만 원 선이다.
신문에 난 수치를 보다 그만 아득해졌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나와 내 가족의 소득은 그 기준선 근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혹은 내 삶의 궤적이 정교하지 못해서”라며 자책해 보지만, 가슴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헛헛함과 우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기분은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표상으로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중산층이라 분류되지만, 치솟는 주거비와 교육비, 물가 속에서 실제로 스스로 중산층이라 느끼는 체감 지수는 사상 최저 수준이라고 하니, 설령 통계적 중산층의 턱걸이에 걸쳤다 한들, 주머니 사정과 씀씀이는 예전 같을 리 만무하다.
이처럼 지표상의 숫자와 현실의 체감 사이에 거대한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
◇중산층의 몰락, ‘양극화 2.0’의 경제학
어느 시대나 빈부격차는 존재했고 중산층의 경계는 흐릿했지만, 왜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 균열은 점점 더 가파르고 심각해지는가?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중산층의 실종 현상을 단순한 불경기 탓으로 보지 않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그의 저서 『불평등의 대가』에서 “승자독식의 시장 구조와 금융화, 그리고 제도적 안전망의 부재가 사회의 허리를 파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시장이 자율적으로 부를 분배할 것이라는 신화는 깨졌다. 상위 1%가 전체 자산과 기회의 사다리를 독식하는 구조가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거세게 몰아치는 인공지능(AI) 혁명은 불평등의 고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 이른바 ‘양극화 2.0’의 시대다. 과거의 기술 혁신이 블루칼라 노동자의 일자리를 위협했다면, AI와 지능형 자동화는 중간 숙련도를 가진 화이트칼라 중산층의 일자리를 집어삼키고 있다.
경제학자대론 아세모글루(Daron Acemoglu)는 MIT 보고서 등을 통해 “기술 진보가 노동의 가치를 대체하는 방향으로만 지속되면, 자본 소득을 쥔 극소수의 엘리트와 대다수 저임금 노동자로 사회가 양극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위자료 2조 원이 현실이 되는 ‘초거대 자본의 시대’와, 아무리 일해도 중산층의 하한선에 미치지 못하는 ‘초단시간·저임금 노동의 시대’가 동시에 달리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중산층을 두텁게 만드는 일은 과연 불가능한 꿈인가?
◇성장의 한계, 그리고 생태경제학과 공공재의 재발견
오늘날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그저 일회성 지원금이나 포퓰리즘공약만 남발할 뿐, 중산층을 복원하기 위한 장기적이고 참신한 사회적 설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중산층 복원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소득의 숫자를 늘려 중산층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기존의 한계에 다다른 경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한한 자본주의적 생산과 성장을 전제로 한 대량 생산·대량 소비 모델은 이미 지구의 생태적 한계에 부딪혔을 뿐만이 아니라, 부의 편중을 가속하는 구조적 한계를 노출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의 지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태경제학자 토마스 피케티(Thomas Piketty)나 허먼 데일리(Herman Daly) 같은 학자들은 인간의 삶의 질이 단순히 ‘개인의 가처분 소득’에만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확연하다.
첫째, ‘불로소득과 기술 임대료(Tech Rent)에 대한 과세’와 ‘보편적 자산 분배’다. AI와 플랫폼, 자본이 독점하는 거대한 부에 적절한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소한의 삶의 기반을 보장하는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둘째, ‘사회적 임금(Social Wage)’의 확충이다. 통계상의 중위소득 숫자를 올리기는 어렵지만, 주거, 의료, 교육, 돌봄, 그리고 에너지를 국가와 사회가 공공재로서 안정적으로 제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개인 소득이 연 3,000만 원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기본적인 삶의 비용이 통제되는 사회라면 국민은 삶의 팍팍함과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소득 그 자체보다 ‘삶을 영위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AI 시대의 참신하고도 본질적인 중산층 복원책이다.
◇거품경제를 너머의 삶, 이제는 국토·생태·교육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만들어 내는 '거품경제'의 구조적 비극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도권 집값 폭등과 서울 수도권 집중 현상은 자본의 거품이 만들어 낸 대표적인 폐해다. 서울로만 모든 자본과 인구가 쏠리는 한, 청년들은 천문학적인 주거비용을 감당하느라 중산층 진입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사회 전체가 거대한 자산 거품에 인질로 잡힌다.
따라서 이제는 ‘국토의 균형 발전’을 마치 헌법적 가치처럼 국가의 절대적 과제로 실현해야 한다. 단순히 지방에 건물을 몇 개 더 지어주는 땜질식 처방이 아니다. 투자에서 소외되었던 농업 분야, 특히 '흙의 생태계'를 다시 살리는 생태적 재투자가 시급하다.
전국 각 지의 '면(面)' 단위 지역마다 인구 1만 명 정도가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문화·의료·교육·디지털 기반의 완전한 문명시설을 갖춘 '생태적 소도시'를 건설해야 한다.
환경과 흙을 살리고, 지방 곳곳에 정주가 가능한 생태 문명 거점을 다지는 일이야말로 거품으로 부풀어 오른 자본주의의 독소를 빼내고, 국민의 주거와 삶의 비용을 근본적으로 낮추어 진짜 '두터운 중산층'을 복원하는 가장 강력한 길이다.
나아가 시장을 단지 국내에만 가두지 않고 전 세계로 확장하는 ‘교육혁명’이 뒤따라야 한다. 국경을 넘어 전 세계 언어와 기술, 지식을 시공간 없이 흡수하고 세계 시장과 직접 호흡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는 교육 체계의 대전환이 일어날 때, 보통 사람들도 특정 대기업이나 자본의 굴레에 매이지 않고 독립적인 경제적 주체로 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한 우리가 정치와 사회의 장으로 끌어올려야 할 '새로운 정치의 이슈'다. 중산층을 두텁게 만드는 일은 어느 시기, 어느 나라나 피할 수 없는 생존 과제다. 2조 원의 위자료라는 초현실적인 뉴스 뒤에 소외된 보통 사람들의 한숨을 방치한다면,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거대한 기술적 풍요 속의 '문명적 빈곤'일 뿐이다.
도대체 '진정한 중산층'이란 소득 분포도의 75%와 200%라는 영리한 수학적 울타리 안에 차곡차곡 쑤셔 넣어진 통계적 미생물들을 뜻하는 걸까? 아니면 콘크리트 거품으로 부풀어 오른 도시의 기괴한 주택 담보 대출에 영혼을 담보 잡히지 않고, 진짜 흙을 밟으며 내일 먹을 저녁 식사를 안정적으로 구상할 수 있는 무사태평한 보통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
만약 후자라면, 불행히도 오늘날의 정치와 정책 입안자들은 이 거대한 대전환의 질문 앞에서 아주 오랫동안 귀를 막고 딴청을 피워온 셈이다.
이제 그 유능하고도 미심쩍은 신사들이, 혹은 우리 사회 전체가 이 황당하고도 거대한 질문 앞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