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한 그릇값이 몇 년 사이에 여섯 배나 껑충 뛰었다. 그런데 그릇 속 내용물은 거의 유적 발굴 현장이다. 젓가락으로 잡히던 깜찍한 파란 강낭콩들은 다 어디로 이민을 떠난 걸까? 이제는 고기 조각 하나 찾으려면 돋보기를 들이대야 하고, 현미경이라도 동원해야 할 판이다.
가격표의 숫자는 인플레이션의 광풍을 타고 쑥쑥 자라나는데, 그릇 안은 기괴할 정도로 다이어트하고 있으니, 짜장면의 생존전략이 신비롭기조차 하다. 가격이 오르면 고기도 더 두툼해져야 정상 아닌가? 이건 거품경제가 아니라, 야무지게 뻥튀기를 튀겨놓은 꼴이다. 어디 그런 게 짜장면뿐이겠는가.
집값 소동을 보고 있으면 기가 찬다. 세상 사람들은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다고 난리법석을 떨지만, 그건 서울 강남을 비롯한 서울과 수도권이라는 아주 특별한 동네 이야기일 뿐이다.
벌초하러 고향(내 고향은 부여다)에 가보면 갈 바람만 쌩쌩 부는 한적한 풍경이 펼쳐진다. 거품도 이런 거품이 따로 없다. 더 황당한 건 이 난리판을 잡겠답시고 정장까지 깔끔하게 차려입고 거창하게 기자회견을 열어 발표하는 정책이다. 이름하여 ‘기준금리 인상’이라는 당당한 선언 말이다.
그분들 논리대로라면 이걸로 물가를 싹 잡아보시겠다는 모양인데, 글쎄다.
아주 솔직히 물어보자, 당장 통장 잔고가 바닥나서 은행 대출을 받아 겨우 버티는 불쌍한 영혼들이 언제 짜장면값을 올리라고 시위라도 했던가?
물가를 하늘 높이 쏘아 올려놓은 진짜 범인은 실체도 없는 거품경제의 환상이지, 매달 꼬박꼬박 억울하게 치솟는 이자를 물어가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이건 마치 동네 방화범은 따로 있는데, 불을 끄겠답시고 불난 집에 사는 세입자의 주머니에서 물세를 세 배로 뜯는 꼴이다.
돈 장사하는 은행들만 배가 부르게 생겼다. 이쯤 되면 그런 이자율 인상은 태평양 한가운데로 시원하게 내던져버리는 편이 나을 거다.
지난 세기 동안 문명을 이끌어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은 끊임없는 소비와 확장을 위해 실체 없는 '거품경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제 그 자본주의적 폭주는 인간의 사유 영역마저 AI의 속도전에 내맡기라 부추긴다.
300년 전 조너선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1726)에서 황당무계하고 실용성 없는 연구를 거창하게 수행하는 학자들을 비판하고 풍자하기 위해 라가도 아카데미를 설정하고 그 연구실에 '단어 조합 기계(The Engine)'를 등장시켰다. 이 기계는 오늘날 생성형 AI처럼 고뇌나 학식이 없는 사람도 위대한 책을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그런 세상이 왔다. 누구라도 AI로 글을 쓰고, 보고서를 만든다. 그런 것들을 이번엔 AI가 심사하고, AI가 양산한 문장들이 출판 시장과 미디어를 채워간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쓰는 고통을 포기한 채 AI에 외주를 주는 이유는 뻔하다. 자본주의가 이식한 '최대 효율'과 '속도'의 관성에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소비와 성장, 기계적 효율성만을 좇는 체제는 이미 지구와 인간 모두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글쓰기와 생각을 포기하고 기계 뒤로 숨을 때, 우리는 거품경제와 기후 재앙을 반성할 가장 강력한 무기인 '생태적 성찰력'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이미 한쪽에서는 AI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실존적 위기'라며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도한 공포가 혁신을 막는다며 '시장 자율'을 외치고 있다
어느 편에 서든, 거품으로 부푼 경제와 기계의 유혹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스스로 고민하고 펜을 드는 느린 행위를 회복해 보자. 숲의 숨소리를 느끼는 '자연 상태의 마음'으로 돌아가 집값의 거품을 빼보고, 제대로 된 짜장면이 나올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보자.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지속 가능한 삶을 모색하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창조적 사고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AI에게 자료를 찾아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철학이나 사고하는 기능을 맡겨선 안 될 것이다. 물론 만족스런 답을 얻을 수도 없을 테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