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1일 삼성전자 노사가 오랜 씨름 끝에 파업을 회피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파국은 면했지만 삼성전자의 노사 문제는 한국경제의 미래에 커다란 숙제를 안겨줄 것은 틀림없다. 과연 노사가 합리적인 합의를 도출하면서 회사의 정신과 사기를 유지해 가며 슬기롭고 원만하게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번 삼성 사태는 한국 기술기업들의 성장모델에 비상등이 커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에 연유한다. 우리 인간은 ‘이성’이라는 훌륭한 도구가 있지만 ‘이익’ 앞에선 욕심과 욕망이 합리적 이성을 억누르기 쉽다. 또 ‘공정성’에 대한 주장도 각 부문 간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 때문에 이익 배분을 놓고 갈등을 벌이고 종내는 깊은 상처를 남김으로써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기도 한다.
극한적인 노사 립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면이 있다. 평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미처 몰랐거나 소홀히 했던 상대의 어려움을 알게 되고, 국외자였다고 생각했던 여론의 따가운 시선도 새삼 느끼게 된다.
민주주의의 강점이란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합의점을 이끌어 내고, 그 합의된 사항을 함께 합심하여 풀어나가는 과정에 있다. 삼성전자 노사가 이런 과정을 보여주기를 바라면서 삼성전자의 영속적 발전이 그들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한다.
◇ 파이낸스 조달 없는 첨단기술 기업 존립 불가능
첨단기술은 기술과 노동이 매우 필요하고 선결 조건이지만 그보다는 자금이 훨씬 중요하다. 첨단기술은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다. 자금이 떨어지는 순간, 공장은 멈춘다. 레거시 기술은 그런대로 생산된 제품을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동안에는 종업원에게 월급을 줄 수 있고 약간의 사내 유보금을 스몰 혁신 개발에 투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호시절은 사라진 지 한참 지났다. 한국의 레거시 기술기업들은 후발국들, 특히 중국 기업들의 저가 공세에 힘겹게 견뎌내고 있다.
지금 한국의 첨단기술 기업은 레거시 기업들보다 더 중국 기업들의 추격에 내쫓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자금조달은 한국보다 훨씬 유리하다. 중국 정부는 우리의 거의 모든 기술기업과 경쟁하는 자국 기업들에게 무한정에 가까운 보조금과 자국 시장 보호 장치를 동원해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 등 시장경제 체제 국가의 기업들은 주로 필요 자금을 파이낸스 시장에서 조달받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일론 머스크가 아무리 부자라도 자기 돈으로 사업 자금을 대는 건 불가능한 까닭에 스페이스X을 주식 시장에 상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삼성전자의 천문학적 자금조달도 주식 시장 등 파이낸싱에서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첨단기술 기업은 두발 자전거를 타고 있는 형국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금 조달 없으면 기술개발은 지체되고 신규 장비 도입이 늦춰지면 생산 차질을 빚게 된다. 이게 몇 번 반복되고 그럴 때마다 부정적 뉴스가 시장에 전달되면 주가는 떨어지고 자금 조달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 파이낸싱이 ‘기술’을 선택하는 구조 이해해야
앞서 얘기한 것처럼 첨단기술은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또 경제 및 기술 생산 생태계가 제대로 선순환 구조 속에서 활력을 잃지 않고 굴러가려면 스타트업도 필요하다는 것이 실리콘 밸리의 경험에서 밝혀졌다. 이런 스타트업이야말로 지속적인 자금 수혈이 이뤄져야 한다. 실리콘밸리의 비밀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성공 가능성이 있는 스타트업에 용이한 자금 조달 시장의 존재이다.
사업하는 곳에는 자금이 항상 필요한데, 생각이 다르고 관심이 다른 자본가들로부터 돈을 모아 리스크가 큰 첨단기술기업과 스타트업의 사업 자금을 대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개미들의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주식 시장이 필요하고 이렇게 자금을 조달하는 기법의 총화를 파이낸싱이라고 부른다.
파이낸싱에서 중요한 부분은 큰손이든 개미든 간에 결국 ‘설득’이다. 즉 투자 수익, 그 기업의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다. 이를 위해서 증권사와 투자은행의 애널리스트, 이코노미스트, 싱크탱크의 보고서, 언론사의 뉴스가 각각 자기 역할을 한다.
미국의 제조업이 무너진 것은 미국 제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아시아 기업 노동 임금보다 높았던 이유가 가장 크다. 삼성전자는 엄청난 성과급 보너스로 줄어든 투자 수익에 대해 국내외 주주들과 투자자들을 설득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설득에 실패하면 자금조달에서 불리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 파이낸싱은 시장의 종속 변수
파이낸싱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현재의 기업이 계속 견실한 영업 이익과 매출을 보이고 배당이 넉넉할 경우 투자를 한다. 또한 그 기업의 미래 전망이 밝다고 시장에서 판단하면 지금 이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투자를 할 것이다.
현재의 기술기업은 세 종류의 기술 제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 레거시 기술, 첨단기술, 신시장 개척 기술이다. 보통 후발 기업들은 레거시 기술 제품에서 돈을 벌어서 첨단기술로 진출하고 첨단기술에서 번 돈을 신시장 개척 제품 개발에 자금을 배분하는 경로를 밟는다.
미래 투자를 위해 자기자본만으로 감당할 수 없고 외부에서 파이낸싱을 수혈 받아야 한다. 삼성은 레거시 기술에서 첨단기술에 이르기까지 제품군을 아우르고 있으며 지난해부터 로봇과 같은 미래 시장개척 분야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일론 머스크가 대단한 경영자인 것은 처음부터 신시장 개척기술인 전기차 사업을 시작하여 돈을 벌고 또다시 신시장 개척 분야인 로봇과 우주 사업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전기차에서 기술 리더십을 보여줬고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신시장 개척 기술 사업인 로봇과 우주 분야에 도전해, 현재 신규 파이낸싱 시장에서 뜨거운 기대를 받고 있다.
대규모 투자는 첨단기술과 신시장 개척 기술 분야에도 필요하지만 레거시 기술도 신규 기술 투자로 스몰 혁신을 계속 경신해 가지 않으면 가성비로 치고 올라오는 후발국의 경쟁품을 이겨낼 수 없다. 삼성전자는 가전과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부문에서 사력을 다하여 시장을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레거시 기술 제품의 경쟁사는 자국 내 경쟁사보다는 후발국 경쟁사가 진정한 적수가 된다. 미국과 유럽의 레거시 기술기업들은 후발국 경쟁사의 추격을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모두 무너졌다. 자국 내 경쟁에서 선발 주자의 이점, 즉 인재 스카우트, 기술 베끼기, 공격적 마케팅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나 후발국 경쟁사는 가성비를 가지고 공격하기 때문에 장기 게임에서 결국 선도국의 기업들이 당하지 못한다.
특히 선도국 기업들이 잦은 노사분쟁을 겪으며 내분이 지속되면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속절없이 추락하게 된다. 삼성의 레거시 제품군들은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다. 삼성 반도체 분야도 늦은 HBM 격차를 잘 극복한 점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국과의 경쟁에서 잘 방어해 내고 있는 레거기 기술 부문 종사자들에게 더욱 찬사를 보내고 싶다.
반도체와 같은 첨단기술은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인데, 이 부문에서 한국은 매우 불리한 나라다. 파이낸싱이 발달한 미국의 첨단기업들은 첨단기술의 시장성만 보여준다면 투자 자금 조달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정부가 그런 대규모 파이낸싱 역할을 직접 담당하고 있다.
특히 신시장 개척 기술 분야의 투자는 미국보다 중국의 보조금 지원 체제가 더 유리한 부분이 있다. 미국에서도 미래 시장의 가치를 시장과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은 정부의 지원 방침이 정해지면 시장 설득은 필요 없이 거의 무한적으로 보조금과 각종 특혜가 주어진다.
한국의 첨단기술과 신시장 기술 개척 기업들은 정부의 절대적 지원을 받는 중국 기업과 세계의 자금시장 중심지에서 풍부한 자금을 공급 받을 수 있는 미국 기업들에 비해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삼성은 현재 먹거리인 반도체만 매달려서는 미래가 불안하다. 그러므로 로봇 등 미래 기술에 진심으로 달려들어야 할 텐데, 성과급 잔치를 하고 나면 로봇에 투자할 돈을 파이낸싱 시장에서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기술기업과 국가의 지속 발전, 혁신 기술 기획력과 파이낸싱에 달려 있다
어떤한 기술기업이나 국가의 미래는 현재의 기술과 노동에 있지 않고 신시장 개척 기술과 파이낸싱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신시장 개척 기술은 마음먹는다고 나오거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술 변곡점에서 가능하다. 산업혁명 이후를 되돌아보면, 증기, 철강, 전기, 컴퓨터, 전자통신, IT와 인터넷과 같은 기술 전환기에 새로운 대기업이 탄생하고 국가의 부가 창출되고 더불어 국격의 위상이 높아졌다.
현재의 신시장 개척 기술은 AI와 로봇, 우주 산업으로 모아지고 있다. 또한 첨단기술과 레거시 기술도 새롭게 재탄생될 여지가 남아 있는 듯하다. 미국이 AI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지만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제조업 분야가 허약해 1990년대 IT 혁명 때만큼 산업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미래 AI 패권에서 제조업을 가지고 있고, AI 기술력도 만만찮은 중국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AI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협업을 통해 상호 보완할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 미국 모델과 중국 모델, 각각 장단점 있다
미국 기술기업 모델은 기술과 파이낸싱이 적절하게 배합된 형태이나 노동자들이 ‘파리’ 목숨이어서 양극화 확대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약점이다. 중국 모델은 정부의 무한정 지원이 강점이다. 중국 기술기업은 아직은 성장 단계이므로 투자가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주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난 뒤에 지속적인 성장을 보여줄지는 미지수다.
중국의 기술기업은 미국의 제재와 압박이 오히려 자극제가 되어 성장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일본과 유럽의 기술기업들은 각각 경영자와 노동자 중심으로 안정을 추구한 결과, 활력을 잃어버린 게 약점이다. 그러나 일본과 유럽 기술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냉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새로운 도전심으로 활로를 모색하는 듯하다. 요즘 일본과 유럽 기업들의 뉴스를 보면 패배주의는 사라지고 현실적인 솔루션을 찾으려는 몸부림이 뚜렷하게 포착되고 있다.
◇ 한국 기술기업 모델, 혁신과 안정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삼성전자의 직원들이 열심히 일한 만큼 성과급을 받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받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적정한 보상이 주어져야 지속적인 혁신도 가능하기 때문에 성과급 지급 자체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그 성과급이 사회 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면 투자자들과 사회적 여론, 정부도 불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한국의 기술기업들은 달러 파워를 기반으로 풍부한 자금 시장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다르고, 무한정 보조금을 지원하는 중국과도 다르다는 우리의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의 기술기업은 전통적인 강점인 조직의 안정과 단결을 해치는 결정은 치명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아울러 파이낸싱을 원활히 수혈받을 수 있는 기업 매력도를 계속 발하지 못하면 미래는 어둡다. 삼성전자 노사는 조기에 갈등을 봉합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