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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간 제주도 사람, 원희룡의 제주비전(1)

민선출범 초기인 1995년부터 제주도지사 선거에 당선된 인물은 ‘제주판 3金 ’으로 불리는 신구범, 우근민, 김태환 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존 3인방의 텃밭인 제주도에서 이들을 물리치고 거센 폭풍을 예고하고 있는 원희룡의 제주비전이 힘 있게 다가온다.

 

제주도가 고향인 그가 검사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정치인 원희룡이 되어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기까지, 그의 소박한 이미지만큼 소탈한 인생과 정치이야기, 그리고 제주도 사람들과 함께 할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젊은 정치인 원희룡. 서울법대 82학번인 원희룡은 일찍이 정치권에 뛰어든 패기 넘치는 젊은 정치인이다. 1982년 대입학력고사에서 332점으로 전국수석을 차지했고, 1992년 제34회 사법시험에서는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정치에 입문한 후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차세대 정치지도자 1위를 기록했으며, 일본 대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한국 정치인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새누리당 당내에서 그는 변화와 개혁을 자처하는 소수파로 통한다. 독자적인 의견을 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정치소신은 늘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왔다.


제주도 서귀포에서 성장


원희룡은 1964년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해 초등학교 내내 운동화 대신 구멍 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녀야 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그 역시 쌀밥구경은 일 년 내내 한 번 하기 힘들었다. 그의 도시락은 고구마를 썰어 말린 ‘일명 빼대기’가 대신했다. 주변에 널린 자연이 전부였던 그 시절 그는 뛰어놀다가 리어카 바퀴에 발가락이 끼어 거의 잘릴 뻔한 사고를 당했다.


지금 같으면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지만 당시 환경은 적당히 피를 멎게 해서 내버려 두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그의 발가락 두 개는 위를 향해 뒤틀리는 장애가 생겼다. 그의 부모님께서는 그런 그의 발가락을 볼 때마다 돈을 많이 벌면 수술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가정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만큼 부모님의 한숨소리는 깊어만 갔다.

 

그의 아린 과거는 훗날 병역면제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를 받게 하기도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의 아버지는 늘 “항상 큰 가치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또한 가난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오직 공부라고 믿었다.


당시 그가 태어난 제주도 서귀포시는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곳이 많아 저녁이면 각지불(석유등)에 의지하며 몽당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공부를 해야 했다. 반듯한 책상대신 사과상자를 엎어 놓고 꿈을 키우던 그의 실력은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눈에 띄게 실력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원희룡은 제주도 제일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동네어르신들은 그를 보며 ‘늦머리’가 텄다고 했다.


학창 시절 내내 전국 수석을 지키며 기대를 모아오던 그는 전국 학력고사까지 수석을 기록하며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신문 인터뷰에서 법 사회학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던 원희룡은 이후 서울대법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사회 첫발은 충격 그 자체

 

부푼 꿈과 기대를 안고 상경한 제주도 섬 소년에게 서울은 충격 그 자체였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민주주의 대신 그 자리에는 군사 독재가 있었다. 또 서울사람들은 다 잘 사는 줄 알았는데 막상 산동네에 가보니 전혀 다른 현실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더군다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섬 소년이 학력고사 전국 수석이란 영광을 안고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선입관은 그의 출생배경의 차이로 배척되는 현실이었다. 그만큼 서울에서의 학창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법과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신군부독재로 인해 민주주의가 사라진 시대적 상황에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와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유기정학을 받게 된다. 그는 주체사상이 아닌 노동자들 입장에서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하고 구로공단에서 야학활동을 하고 인천공단의 한 공장에서 일반 노동자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당시 그는 캠퍼스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민중과 함께 하겠다는 이상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그에게 지식인으로서 가졌던 특권과 우월의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경찰의 주시를 받는 가운데서도 과외교사와 번역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고 최저수준의 생활을 감수하면서 몇 년간 사회 운동에 열중했다. 그러나 몸은 공장 노동자로 일을 하지만 머리는 늘 지식인의 고뇌에 싸여있게 되는 날들이 계속되면서 노동운동보다는 이론과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자신에게 맞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게 된다. 그의 이러한 고뇌와 이상은 휴학을 반복하게 했고 결국 모자라는 학점 때문에 그는 입학한 지 8년 만인 89년에서야 대학졸업장을 받게 된다.


그리고 89년경부터 그는 사회 운동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점점 깊어지다가 90년대에 들어 비로소 개인의 진로에 대해 고심하게 된다. 그리고 2~3년 동안 이념과 투쟁의 방법론에 대해 고민한 후 기존에 갖고 있던 틀을 버리면서 구체적이고 안정된 위치의 역할을 해나갈 결심을 하게 된다.


"89~90년에 현실사회권이 무너지면서 드러난 실상이 이론적으로 배웠던 것과 다른 허상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인류가 발명한 실패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특히 북한의 모습을 보면서 이념적인 면에서 방황을 많이 했는데요. 그러면서도 그 동안 소외받은 이웃과 함께 살고자 했던 ‘투신’의 열정은 현재 제 삶의 가장 근원적인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를 이와 같이 회상했다.


공익을 위해 법조인의 길을 결심

 

그는 "당시 이념적인 방황과 혼란을 가진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대신 이념의 폭은 많이 넓어진 만큼 그간의 사회 운동 경력은 그에게 큰 사회적 아킬레스건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경력을 덜 문제 삼는 사법시험을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법의 이치를 통해 새로운 방향과 틀을 갖추고 싶은 그의 욕심도 한몫했다. 이렇게 그는 공익을 위해 가자는 차원에서 법조인의 길을 결심하게 된다. 오랜 기간 사회 운동을 하다가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뒤늦게 고시준비를 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그는 고시공부 기간 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토로한다.


"무엇을 위해 고시공부를 하는가 라는 회의와 어두운 충동이 일어나 아예 공부를 포기해 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오면서 죽음의 고비도 견뎌냈던 것을 생각하며 아무리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새로운 상황이 온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새기고, 나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참담한 상황에서도 밝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내 정신이 부서지기 전까지는 버티자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사회 운동하던 당시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노력하여 결국 그는 사법시험 수석이라는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이후 그는 서울지방검찰청,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등을 거치며 검사생활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는 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후 사표를 던지게 된다.


"몇 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마약 수사까지 해봤습니다. 마약 관련 범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기 때문에 정말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생각이 순간순간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범죄자들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내가 더 거칠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유혹도 들더라고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러다 정말 사람 이상해지겠다 싶었죠."

 

그가 꿈꾸던 대한민국은 격변하는 우리사회의 대립과 갈등 구조를 해소하고 국민대통합을 이루어 국가 선진화라는 우리시대의 사명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는 거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완주하고 난 후 원희룡은 ‘한나라당의 희망이자 미래’ 라며 타 후보들로부터 평가받기에 이른다. 당시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 그는 차세대 정치리더 1위로, 세계경제포럼이 선발한 ‘차세대 지도자’(YGL.Young Global Leader)로 선정되기도 했다.

MeCONOMY Jun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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