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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글쓰기의 새 지평을 연 박지원 문학

한국정신문화찾아서(32)

 

연암 박지원을 보통 북학 사상가, 실학사상가로 평가하며 그가 남긴 글들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는데 그런 서술은 연암을 좁은 틀에 가두는 듯하다. 연암의 진가는 그의 작품 자체에 내재돼 있다고 본다. 「열하일기」와 「허생전」과 같은 대표 작품들을 음미하는 것이야말로 오롯이 그의 문학정신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근래에 들어서도 다양한 「열하일기」 해석본이 꾸준히 출간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 책들이 독자들에게 잘 읽혀질 수 있도록 학계와 문학계의 노력이 멈춰져서는 안 될 것이다.

 

「열하일기」가 한문으로 써진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 연암이 살았던 18세기 지식인들은 주로 한문으로 글을 썼고, 한문으로 씌었다고 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영문학과 불문학, 독문학의 작품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읽으면 우리의 자양분이 되듯이 한문으로 쓴 작품을 한글로 해석하면 우리 것이 된다.

 

하물며 선조들이 쓴 한문 작품은 당연히 우리 것이다. 18세기에 한글로 쓴 작품들도 오늘날 읽으려면 전문가의 손으로 번역 수준의 글로 다듬어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중세 영어를 현대영어로 바꿔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나라 문학이 같다.

 

언어는 계속 변하는 것이다. 현대 언어학에 의해 표준문법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한국문학이고 영문학이고 사정은 같다. 이런 의미에서 한문으로 써진 우리나라 옛글들은 지속적으로 알려져서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열하일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일군의 실학자들을 제외하고 조선의 지식인들은 문장을 도리를 전하는 수단으로 보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오직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유학경전을 달달 외우며 과거 공부를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연을 보고 느낀 감성을 전하는 시와 산문들이 있지만 윤리적이고 도리적인 틀을 벗어난 경우는 드물었다. 조선 선비들은 그저 짧은 시와 산문으로 정서적 갈증을 달래는 정도였다. 연암의 「열하일기」은 이와 같이 범할 수 없는 도리와 억눌려진 감성·의지를 떨쳐버리고 사물과 현상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자신의 주장과 관점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였다.

 

인간 심성을 어떻게 하면 수신제가치국에 모을 수 있을까 하던 글쓰기를 연암은 통쾌하게 걷어차 버렸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나오자 조선 문인들 사이에 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났던 것이다.

 

연암은 과거 시험을 보는 둥 마는 둥 했고, 30대 중반에 과거시험 보기를 폐하였다. 연암 문장의 대담성과 활달성은 바로 족쇄처럼 조선 지식인들을 얽어맸던 과거 시험을 보지 않는다는 일대 결심을 함으로써 이루어진 성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연암은 그의 5대조가 선조의 부마였을 정도로 명문가였으나 조부는 지나칠 정도로 청렴했다. 연암은 부친이 벼슬을 하지 못해 매우 궁색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공부를 제대로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그는 장가들고 난 뒤에야 장인과 처숙부로부터 본격적인 지도를 받았다.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자 새로운 학문의 조류에 눈을 뜨게 되고 거기에 푹 빠져들었던 듯하다. 며칠간 책만 읽기도 하고 굶기도 했다는 기록을 봐서 그 때 문장의 도를 깨치고, 자기만의 철학 논리, 이른바 북학사상을 세우게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우리는 사실과 사실 같지 않은 ‘불량’ 사실이 너무 넘쳐나서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 옛날에는 사실을 기록하는 이들이 없었다. 누가 사실을 기록한다고 해도 그 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니 생계는커녕 관에 끌려가 호되게 문초를 당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암을 필두로 실학자들이 드디어 경전을 외우고, 경전 구절로 시를 짓던 글쓰기에 벗어나 ‘사실’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주의적 글쓰기만으로도 실학자들은 우리 역사에서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지원

 

사신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자 얼마 안 가 있는 애라하 강가에서 텐트를 쳤다. (소설가 김문수 역 「열하일기」에서 인용, 돋을새김 간) 

 

“이 애라하의 크기는 우리나라 임진강과 비슷했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은 곱고 물은 맑은데 정경이 탁트이고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했다. 그리고 그 속에 큰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개·닭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땅이 기름져 개간해도 좋을 듯했다. 패강 서쪽과 압록강 동쪽에는 이에 비할 만한 곳이 없으나 너·나가 모두 이를 버려두고 빈 땅이 되었다. 어떤 이는 ‘고구려 때 이곳에 도읍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이는 이른바 국내성이다.”


“노둔 친 곳을 다니며 보았다. 역관은 세 사람씩 한 막을 또는 다섯 사람씩 장 하나를 쳤다. 역졸과 마부들은 다섯 혹은 열 명씩 어울려 시냇가에 나무를 얽어매고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밥 짓는 연기가 자욱했고 닭 수십 마라를 잡아 씻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물로 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며 나물을 볶고 밥은 기름기가 자르르하니 매우 푸짐했다. 이윽고 부사와 서장관이 이르렀다. 이미 황혼 무렵이었다. 30여 군데에 횃불을 밝혀 동틀 때 까지 꺼지지 않게 했다. 군뇌의 나팔 소리에 3백여 명이 소리를 맞춰 고함을 지른다. 호랑이를 경비할 목적이었다. 한밤중에 소나기가 억수로 퍼부어 장막이 새고 바닥에는 습기가 잔뜩 차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비가 개고 별들이 총총 드리워 손을 뻗으면 어루만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문장을 보면 18세기에 중국 외에는 세계와는 단절된 채 살아가는 조선 선비들의 글이 맞는가 할 정도로 현대적인 감각의 글이다. 사실주의와 함께 서정미도 물씬 풍긴다.


「열하일기」에는 연암의 해박한 역사적 지식을 유감없이 보여준 대목도 곳곳에 보인다.


“우리 선비들은 오직 지금의 평양만 앎으로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믿지 않는다.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면 그렇게 믿으며 또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면 그걸 믿는다. 그러나 봉황성이 바로 평양이라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해괴한 말이라며 나무랄 게다. 그런 사람들은 요동이 원래 조선 땅이며 숙신, 예, 맥, 동이 등 여러 나라가 다 위만조선에 예속됐던 것을 알지 못한다. 또 오라, 영고탑, 후춘 등지가 원래 고구려의 옛 땅인 것을 알지 못한다...”


“발해 무왕이 일본 쇼무 왕에게 보낸 글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물려받았다’는 내용이 있으니, 이로 미루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또 나머지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 서로 끌어안고 달려온 형국이니 이는 본시 우리 강역 안에 있었음을 한층 명확하게 한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디라는 것은 일정치 않았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으레 지금의 평양을 표준삼아 이리저리 패수의 자리를 찾고 있다... 그런 즉 고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우선 여진을 우리 국경 안에 넣고 그다음에 요동에 가서 패수를 찾아야 옳다. 그래서 패수가 일정해진 연후에 강역이 밝혀지고 그에 따라 고금의 사실들이 부합되는 것이다.”


연암은 중국 사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서들을 심도 있게 읽고 그 행간의 모순과 조선 선비들의 잘못된 인식을 명백히 지적했다. 그런 후에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요동과 여진 땅에 걸쳐 있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연암은 끝없이 펼쳐진 요동 벌을 보고 말을 세워 사방을 둘러보다 나도 모르게 손을 이마에 얹고 말했다.

 

“참으로 좋은 울음터로군. 한 번 울만 해.” 그러자 옆에 있는 이가 “이토록 천지간에 드넓은 시야를 얻게 되었는데, 울고 싶다니 거 뭔 말씀이오?”하고 묻자, 이에 대한 연암의 말은 당대엔 도저히 들어봄직 하지 않은 호쾌한 감성을 뿜어낸 문장이다.

 

“천고의 영웅이 잘 울었고, 미인도 눈물이 많다 하오. 하지만 그들은 소리 없이 몇 줄기 눈물을 흘렸소.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마치 쇠와 돌에서 나오는 듯한 울음을 듣지 못했소. 사람은 희, 노, 애, 락, 애, 오, 욕 칠정 중에서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고 있지 칠정 모두 울 수 있는 것임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과 사랑이 사무쳐도 울게 되오. 또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오. 불평과 억울함을 푸는 데는 소리보다 더 빠른 게 없소.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 우레와 같은 것이외다....”

 


“그러니 우리는 의당 갓난아기들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 저 비로봉 산마루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황해도 장연 바닷가 금 모래밭을 거닐면서도 울어볼 만하며, 이제 요동 벌판에 와서 여기서부터 산해관까지 1천2백리 사방에 전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과 땅 끝이 맞닿아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소!”

 

연암은 심양에서 전사가란 이름의 골동품상 주인을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눈다. 그의 말을 빌려서 골동품 감별에 대한 지식을 자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심층 인터뷰를 하고 철저히 취재한 글을 썼다.


“대체로 골동기는 흙에 들어가면 청색이 나고, 물에 넣어 두면 녹색, 무덤 속 것들은 흔히 수은 빛을 내는데, 어떤 이들은 시체의 기가 스며들어 그렇다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수은으로 염을 했기 때문에, 제왕의 능묘에서 나온 그릇은 수은이 옮아 오래된 것일수록 속속들이 스며 배는 법입니다.”


그리고 보통 그릇을 가짜 골동품으로 위조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세밀히 전하고 있다.

 

 

“대개 그릇을 주운 뒤에 칼로 무늬를 새기고 글자를 파 넣은 다음, 땅에 구덩이를 파 거기다가 소금물을 두어 동이를 붓고 그게 마르면 그 속에 그릇을 묻어뒀다가 몇 년 뒤에 꺼내면 제법 옛것처럼 보입니다. 이보다 더 교묘한 방법은 붕사, 한수석, 망사, 담반, 금사반으로 가루를 내어 소금물에 풀고 붓으로 그릇에 골고루 먹이어 말린 뒤 여러 번 씻은 다음 다시 붓질하고, 이러기를 하루에 서너 번씩 한 뒤 깊이 땅을 파서 그 속에서 숯불을 피워 구덩이가 화로처럼 달게 해 진한 초를 뿌리면 구덩이가 펄펄 끓으면서 곧 말라버립니다.”

 

“그때 그릇을 넣으면 초 찌꺼기로 두텁게 덮고 또 그 흙을 다져 빈틈 없이 서너 달 지난 뒤 꺼내보면 여러 가지 알록점이 나타나 있게 됩니다. 거기다 다시 댓잎 태운 연가를 쐬어 푸른빛을 더 짙게 해 납으로 문지르되 수은 빛을 내려 한다면 바늘로 가루를 만들어 문지르고 그 위에 백납으로 닦으면 그럴싸한 고색이 납니다. 그러고도 일부러 한쪽 귀를 떼기도 하고 또는 몸체에 흠을 내기도 해 상(商), 주(周), 진(秦), 한(漢) 시대의 유물이라고 속이는 것은 참으로 악랄한 짓입니다.”

 

전사가란 상인이 이토록 친절하게 소상히 가르쳐 준 것도 대단하고 그걸 잘 정리하여 기록한 연암도 꼼꼼한 지식욕에 탄복이 간다. 필담으로 주고받은 내용을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깔끔히 정리한 듯하다. 연암은 산해관에 이은 만리장성의 장대에 오른 경험을 풍파 많은 자신의 인생에서 느낀 소회와 잘 어울리는 글을 남겼다.

 

“일행인 여러 사람들과 장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장성은 북으로 뻗었고, 창해는 남에 흐르고, 동으로는 큰 벌판에 임했으며, 서로는 관 안을 엿보게끔 되었다. 그러니 이 대만큼 조망이 좋은 곳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관 안의 수만 호 거리와 누대가 마치 손금을 보듯 뚜렷하며 전혀 가려진 곳이 없다.

 

하늘을 찌를 듯 바다에 솟은 봉우리는 창려현 문필봉이다. 한참 서서 바라보다 내려오려는데 아무도 내려가려는 사람이 없다. 벽돌로 쌓은 층계가 쭈뼛쭈뼛해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렸다. 하인들이 부축하려 했으나 몸을 돌릴 자리가 없어 오히려 낭패할 것이다.”


“나는 서쪽 층계로 간신히 먼저 내려와 대 위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모른다. 오를 때에 는 앞만 보고 층계를 하나하나 밟고 올랐기 때문에 위험함을 몰랐는데, 내려올 때는 까마득한 밑을 내려다보게 되어 저절로 어지럼증이 생겼다. 죄가 있다면 눈에 있는 것이다. 벼슬살이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자꾸만 위로 올라갈 때는 한 계급 반 계급 이라도 남에게 뒤질까봐, 또는 남을 밀어젖히고 앞을 다투다가 드디어 높은 곳에 이르게 되면 그제서야 두려운 마음이 생겨 외롭고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에는 천 길 절벽이라 올라갈 의욕도 끊기고 만다. 그렇다고 내려오는 것도 어려운 법이다.”

 

「열하일기」는 희한하게도 ‘호질’과 ‘허생전’이란 짧은 소설을 포함하고 있다. 양반의 허위 의식과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우화 풍자소설이다. 「열하일기」는 백성들은 물론 양반도 가보기 어려운 사행 길을 흥미롭게 서술한데 덧붙여 허구적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작가의 메시지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듯하다. 연암은 열하일기 외에도 여러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한국문학사상 사실적 글쓰기와 허구적 이야기를 모두 통달한 최초의 문인이 아닐까 싶다.

 

MeCONOMY magazine March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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