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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987년, 그날의 찬란했던 6월과 오늘 –영화 ‘1987’을 통해서


<M이코노미 김선재 기자> 지난 9년간의 보수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 수준은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았던 2000년대 초보다 더 후퇴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 절정을 이뤘던 때가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고, 그런 사회적 구조 속에서 쌓여온 국민들의 분노는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와 헌정 사상 최초의 현직 대통령 탄핵, 법과 제도가 정한 방법에 의한 세 번째 정권 교체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지난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 교체를 이루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 ‘항쟁’·‘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촛불 집회’ 이후 사회 부조리와 불합리 등 적폐에 대한 청산 요구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현행 헌법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1987년 6월10일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개봉해 지금까지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6·10 항쟁’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타도와 국가의 민주화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 등에 모여들었던 촛불과 닮아있다. 또한 지난 촛불을 계기로 30년 만에 ‘6·10 항쟁’이 완성됐다는 평가에서 당시와 지금은 맞물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27일 개봉해 올해 1월28일 기준 관객수 700만 명을 넘긴 영화 ‘1987’이 여전히 관객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는 1987년 1월14일 발생했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 사건은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6월10일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대통령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다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음에 따라 이를 위한 개헌 논의가 한창 이뤄지고 있는 정치권에서는 영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달 7일 취임 이후 세 번째로 직접 극장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영화관람 후 “가장 마음에 울림이 컸던 대사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였다. 실제로 6월 항쟁, 또 그 앞에 아주 엄혹했던 민주화 투쟁의 시기에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말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저는 이 영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실제로 한순간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항쟁을 한 번 했다고 세상이 확 달라지거나 그렇지 않다”면서 “그러나 영화 속에 87년 6월 항쟁이 우리가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를 통해 봤던 어떤 택시운전사의 세상, 그 세계를 끝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함께 힘을 모을 때, (영화 속) 연희(김태리 분)도 참가할 때 세상이 바뀐다 하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같은 달 14일 영화를 보고 무거운 표정으로 “굉장히 무거운 영화다, 사실의 무게가 굉장히 무겁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 위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라면 서 “그것을 한시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영화 ‘1987’은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부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 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맞은 연세대학교 2학년 이한열 열사의 죽음, 그리고 6월10일 민주화 항쟁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다루고 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었던 박종철 군이 경찰에 체포돼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물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반공(反共)’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돼 온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국민에 대한 억압과 폭력, 잔혹함 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던 박종운(박종철 군의 서울대학교 선배)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종철 군을 참고인 신분으로 연행했지만, 종철 군이 박종운의 소재를 말하지 않자 고문을 가했다. ‘민주화추진위원회’은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으로, 1985년 10월29일 검찰은 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을 구속 및 지명 수배했다.


박종철 군 사망 이후 경찰은 시신을 화장해 사건을 덮으려 고 했지만, 다음 날인 1월15일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에 대한 신문 기사가 보도되자 사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심장마비’ 에 의한 단순 쇼크사로 사건을 조작·축소·은폐한다. “조사관 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화에서는 대공수사처 5처장 박처원 치안감(김윤석 분)이 한 말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강민창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이 한 말이다. 김윤석 씨는 이 신(scene)을 연기하면서 “원래는 한 번에 가야 하는 대사인데, 연기를 하면서도 워낙 황당해서 중간에 ‘어?!’하는 추임새를 넣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학규 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당시에 대해 “1월15일 중앙일보의 박종철 군 사망에 대한 최초 보도 이후 같은 날 저녁 박종철 군에 대한 부검이 이뤄졌고,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는 사인을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판단했다”며 “부검 이후 황 부검의는 치안본부에 불려갔는데, 영화에서는 강 치안본부장과 독대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박 치안감 등이 배석해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황 부검의는 사인에 대해 정확하게 말했지만, 강 치안감은 다음 날인 16일 부검결과를 기발표한 데로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없는 심장마비에 의한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당시 동아일보가 시신을 최초로 검안했던 오연상 당시 중앙대학교 병원 내과의의 “현장에 갔을 때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가슴에 청진을 했을 때 수포음이 들렸다”는 등의 증언을 통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의혹이 확산되는 모습을 보이자 박종철 군 사망 닷새 뒤인 1월 19일 경찰은 자체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박종철 군 조사 과정에서 물고문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군의 목이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고 밝혔다. 김 사무국장은 “17일 관계 기관대책회의에서 ‘경찰에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자’는 명목으로 검찰은 수사권을 포기하고 경찰이 자체조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면서 “이후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장이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고 19일 자체조사결과를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보도(동아일보 1987년 1월19일 ‘물고문 도중 질식사’)에 따르면 강 치안본부장은 “경찰 자체특별조사단을 구성해 박 군을 직접 조사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상대로 박 군의 연행 경위, 사망 원인 등을 철저 규명한 결과 담당 수사관의 고문에 의한 사망임이 확인됐다”며 “담당조사관 조 경위와 강 경사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혐의(가혹 행위에 의한 치사)로 이날 오전 구속했으며, 이 사건에 대한 감독책임을 물어 대공수사 2단장 전석린 경무관을 직위해제했다”고 말했다.


4·13 호헌 조치, 정의구현사제단 성명 그리고 6·10 항쟁


경찰은 조 경위와 강 경사 구속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지만, 박종철 군의 연행 시간과 고문에 가담했던 경찰관 수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또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더 거세졌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정권을 괴롭게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전두환 대통령은 4월13일 ‘특별담화’를 통해 “본인은 평화적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양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가를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한다”면서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판단,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금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 선거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없이 실시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민정당(민주정의당)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중에서 당적 절 와 민주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조선일보 1987년 4월14일 ‘현 헌법으로 정부이양’). ‘4·13 호헌 조치’다. 결국 ‘체육관 선거’로 대표되는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기존 헌법을 고수해 독재를 이어가겠다는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러던 중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5월18일 서울 명동 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구속된 2명의 경찰관 외 3명의 범인이 더 있다고 폭로했다. 황정웅 경위, 반 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이었다. 5월21일 이들은 조 경위·강 경장과 같은 혐의로 구속됐다.


경향신문(1987년 5월22일 ‘박종철 군 치사 세 경관 더 있었다)’에 따르면 정구영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5월 초순경 구속수감 중인 조 경위 등 2명이 교도관을 통해 담당검사와의 면담을 원한다는 전달을 받고 지난주 초 이들을 면담한 결과 조 경위 등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종전의 진술내용을 번복, 자신들 이외에도 3명이 범행 에 가담했다는 진술을 했다”며 “사건 발생 당시 황 경위 등 3명을 일단 참고인 자격으로 불러 수사를 했었으나 이들이 가담사실을 완강히 부인, 검찰도 속았었다. 조 경위 등의 진술 내용을 토대로 이번에 구속된 황 경위 등 3명의 신병을 확보 범행사실일체를 자백받았다”고 밝혔다.


조 경위 등이 심경변화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구속 기간 중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가 공판기일이 다가오자 자신들이 전적인 책임을 지고 중형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면서 “당초 조 경위 등이 범행관련자는 자신들만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현장을 지휘한 수사반장으로서 어차피 처벌을 받게 될 조 경위와 피의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강 경사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재야단체와 야당, 종교계, 대학생들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조작 범국민 규탄대회’를 계획했다. 그리고 규탄대회 하루 전인 6월9일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도중 이한열(당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7월5일 사망) 군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사건은 전국 50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6월 한달간 “호헌 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게 한 기폭제가 됐다. 모든 국민들은 시위에 지지를 보냈고, 도로 위의 자동차들은 오후 6시 일제히 경적을 울리는 것으로 시위대를 응원했다. 결국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당시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 ‘시국수습 8개항’을 담은 ‘6·29 선언’을 통해 국민에 항복했다.


정권교체 실패한 ‘미완의 항쟁’…2016~2017 촛불로 완성


그러나 6·10 민주화 항쟁으로 대표되는 6월 항쟁은 미완으로 남게 된다. 김영삼, 김대중 등 민주화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양김(兩金)이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 분열했기 때문이다. 결국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에 대해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11일 JTBC ‘썰전’에 출연해 “광장에서는 승리하고 제도권에서는 졌다”고 당시를 평가했다. 우 전 원내대표는 “그때 당시 우리가 받았던 상처는, 그때 당시 말로는 ‘아, 죽 쒀서 개줬다’였다. 우리가 고생해놓고 정치권이 다 날려 먹은 꼴이었기 때문에 그 패배감이 어마어마했다”며 “87년 8월 말에 끌려갔다가 12월30일 출소했는데, 황폐해져 있었다. 6월 항쟁 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동료들이 ‘누구는 후보 단일화했고, 누구는 백지화했다’면서 서로 안 만나고 있었다. 불과 4~5개월 전에 승리를 자축하고 끝끝내 민주 정부를 수립하자던 사람들이 ‘저놈 때문에 졌다’이러면서 서로 찢어진 것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지난번 촛불이나 탄핵 때 가장 긴장했던 것이 누군가를 끌어내리거나 항쟁에 성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승전결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87년은 6월의 승리 이후 12월에 너무 좌절을 깊이 했고, 그게 너무나 큰 상처였다”고 덧붙였다. 유시민 작가는 “1987년 12월의 분열이 역사적으로 효과가 큰 분열이었고, 그로 인해서 6월 항쟁의 성과가 반토막이 났다고 본다”면서 “질 줄은 알았지만, 마음 속으로 승복이 안 됐다.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새도록 운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실이 밝 혀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고, 2016년 10월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던 1,700만개의 촛불은 2017년 3월10일 1987년 개헌으로 만들어진 헌법재판소를 통해 무능한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정권을 교체하는데 성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987’을 관람한 후 “정권교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완으로 남게 된 6월 항쟁을 완성시켜주고 있는 것이 지난 겨울부터 우리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촛불 혁명”이라며 “이렇게 역사는 금방금방은 아니지만, 긴 세월을 통해서 뚜벅뚜벅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하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의 기억, 경찰 인권센터·기념관·조형물로 현재에 전해져


1987년 6월 항쟁 이후 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시의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박종철 군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민주화를 열망하고 요구했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가두고 폭행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인권유린과 고문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은 현재 경찰 인권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1976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설립된 이곳은 1983년 지상 7층으로 증축돼 현재의 규모에 이르고 있고, 2005년부터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건물 4층에는 ‘박종철 기념관’이 마련돼 있고, 5층에는 당시 박종철 군이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던 509호 조사실이 보존, 일반에 공개 중이다.


건물에 들어서서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리면 ‘박종철 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1980년대 우리나라의 사회상황을 보여주는 사진들과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를 보도한 여러 매체의 신문기사, 박종철 군의 유품과 그의 친필 편지, 박종철 군의 사망진단서 등이 전시돼 있다. 민주주의를 외치며 맨몸으로 무장한 병력들과 맞섰던 시민들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정권의 억압에 짓눌려 있던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그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했던 당시 정권의 잔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이곳을 찾은 다나카 유우키 씨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실제로 고문이 있었던 장소를 방문하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며 “이 장소는 한국이 독재, 고문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일본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이곳을 찾은 이홍범 씨는 “말로만 들었던 남영동 대공분실, 너무 끔찍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였던 현장에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 여기에서 과거에 민주열사들이나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던 분들이 엄청난 고초를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면서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던 509호나 김근태 전 의장이 고문을 받았던 515호를 보니까 차후에도 이런 참혹한 일들이 우리나라에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사소감을 전했다.


아쉬운 것은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들과 박종철 군에 대해 일 반 대중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그저 전시된 사진과 유품에 부착된 간단한 설명에 의존한 채 당시를 상상해야 했다. 16개의 조사실이 있는 5층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박종철 군이 고문을 받았던 509호 조사실만 추모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을 뿐 다른 조사실은 그냥 철문만 개방된 채 사실상 ‘방치’돼 있었다. 그마저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곳은 509호 조사실 밖에 없었고, 다른 조사실은 2005년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욕조, 침대 등이 철거됐다. 고 김근태 전 국회의장이 모진 고문을 받았던 515호 조사실도 지금은 세면대와 변기만 남아있는 상태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이런 곳에 조그맣게 이 조사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누구였다는 설명만이라도 부착돼 있으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좀 더 수월하게 당시를 이해하고 어두웠던 우리의 현대사를 기억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며 “경찰이 관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남영동 대공분실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외에도 고 김근태 전 의원의 민청련 사건뿐만 아니라 학림사건, 각종 간첩 조작 사건 등 ‘빨갱이를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고문과 불법이 자행되던 장소다. 때문에 이곳을 시민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움직임이 박종철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일고 있다. 지난달 2일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경찰이 운영 하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사회가 운영하는 인권기념관으로 바꿔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지난달 29일 기준 1만 3,326명이 청원에 참여했다.



또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 열사의 희생을 기리는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이하 기념비)’와 그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비와 흉상은 1997년 6월 설치된 것으로, 기념비에는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열사의 의로운 죽음은 모든 민중 운동가의 본보기가 됐으며 2·7과 3·3투쟁을 거쳐 고문 살인으로 진상을 은폐·조작하려던 군사독재정권의 만행이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의해 폭로되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활활 타오르게 됐다’고 적혀있다.


이한열 열사의 기념관은 지하철 2호선 신촌역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을 방문한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남긴 메시지들이다. 그와 연세대학교 동문인 우상호 전 원내대표는 “그해 6월 눈부신 아침햇살 당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짧은 인생을 살고도 영원한 삶을 얻은 이한열 열사! 우리 국민은 그대를 이 나라 민주화를 가져온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장하다, 미운오리새끼. 이럴 수가 있느냐! 이한열, 네 모습이 보고 싶구나”라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남겼다.



기념관 안에는 그의 유품이 전시돼 있는데,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았을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을 전시해 놓은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와 함께 최근에 복원작업을 마친 그의 타이거 운동화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동료 학생이 일으켜 세우고 있는 사진도 전시돼 있다.


연세대학교 교정 내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2016년 6월9일 연세대학교와 이한열열사기념사업회는 이한열 열사가 쓰러졌던 자리에 그를 추모하는 동판을 놓았다. 동판에는 “1987년 6월9일 오후 5시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곳, 유월민주항쟁 의 불꽃이 피어올랐다”라고 적혀있다. 100주년 기념관 옆 ‘이한열 동산’에는 그의 희생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설치돼 있다. ‘198769757922’라고 새겨져 있는 기념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1987년 6월9일 희생됐고, 7월5일 사망했으며 7월9일 전국적인 추모 속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의 나이 22세였다’는 의미다.



국민을 위한 개헌 논의 이뤄져야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얻어낸 현행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논의가 정치권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 대선에 나섰던 모든 후보가 개헌에 찬성했기 때문에 개헌 자체에는 이견이 없으나 권력 구조와 정부의 형태에 대해서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모습이다. 또한 개헌안에 대해 국민들에게 의견을 묻는 시기도 여전히 여야 간 입장 차이가 있다. 그 과정에서 개헌특별위원회의 안이 ‘사회주의’ 개헌이라는 논란에 휩싸이면서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정치권은 지난 촛불 정국에서 “이게 나라냐”는 국민들의 절망 섞인 울부짖음과 원망에 반성하고 국민들이 살기 좋은 나라, 상식이 통하고 공정·공평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 정치권에 과연 그때의 마음을 갖고 개헌 논의에 임하는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있을지 걱정이다. 버릇처럼 입에 올리는 ‘국민’을 그들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자신들의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기에 앞서 국민들의 삶에 실질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개헌 논의에 힘써야 할 것이다.


MeCONOMY magazine Februar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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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의대 정원 확대는 불변”... 의협 차기회장 “대정부 강경투쟁”
대한의사협회가 임현택 차기 협회장을 중심으로 대정부 강경 투쟁에 나설 전망인 가운데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가 의료 정상화의 필요조건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27일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27년 만의 의대 정원 확대는 의료 정상화를 시작하는 필요조건”이라며 “의대 정원을 늘려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 수를 확충해야한다" 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의사들은 갈등을 멈추고 대화의 장으로 나와 의료 정상화 방안을 발전시키는데 함께 해달라"고 말하며 "의대 교수들은 전공의들이 하루빨리 복귀하도록 설득해주고 정부와 대화에 적극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마저 사직서 제출이 이어지면서 의료 공백이 심화할 것으로 보인데. 그런 가운데 정부는 공중보건의사(공보의)와 군의관 200명이 현장에 추가로 투입할 예정이다. 한편, 임현택 의협 차기 회장 당선인은 "전공의 등이 한 명이라도 다치면 총파업을 하겠다"며 강경대응 입장을 굽히지 않아 의정 간 갈등이 쉽게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26일 결선투표에서 당선된 임현택 회장의 임기는 오는 5월 1일부터지만, 의대 입학정원 증원에 반발해 꾸려진 의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