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홈에서 영글어 가는 ‘파란 꿈’ 많이 응원해 주세요!

2015.09.13 12:39:52

대전 '밝은 내일의 집' 문연희 대표


여러 명의 아이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생활하는 가정을 이르는 그룹홈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1997년이다. 당시 유엔협약에 의해 도입된 그룹홈은 현재 많은 아동과 청소년들의 포근한 안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  014년 말을 기점으로 전국에는 476개소의 그룹홈이 운영 중에 있으며 여기서 생활하는 아동과 청소년 수만 해도 2천588명에 이른다.


가정공동생활인 그룹홈은 일반 보육시설과 달리 부모가 생존해 있으면서 학대, 방임. 유기, 부모의 이별, 수감, 질병, 가출 등으로 인하여 양육을 할 수 없는 아동과 청소년(만 0~18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아동과 청소년은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로 지정되어 개별 수급자가 되고 월 평균 35만원 내외(원가족의 부모 소득이 있다면 지원금이 줄고, 장애가 있다면 장애수당이 나와서 조금 더 받는 구조)의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그룹홈에서는 아이들 개개인에게 수급되는 돈으로 학원비, 식비, 피복비, 용돈, 보험료 등을 충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룹홈은 어떤 사람들이 운영할 수 있을까? 우선 그룹홈을 운영하려면 30평대 정도의 공간과 일정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그룹홈에서는 시설장과 보육사 1명씩을 둘 수가 있는데 시설장은 아동복지법 시행령에 의거 아동복지시설 종사자 자격기준을 갖춘 자로서 사회복지사(2급 이상)를 취득 후 아동과 관련한 사회복지업무에 3년 이상종사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또 보육사는 사회복지사 3급 이상, 그리고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한다. 시설장과 보육사는 정부로부터 매달 지원금(약 145만원)과 시간외근무수당(8~11만원), 처우개선비10~20만원, 개별 지방자체단체 예산마다 다름)를 받는다. 이들이 매달 수령하게 되는 돈은 본인 부담사회보험료를 제외한 월 평균 160만원 정도이다.


(사)한국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 최선숙 국장은 “이들이 통상 24시간 365일을 2명의 종사자들이 맞교대 근무를 해야 한다”면서 “생활시설이라 야간, 명절, 연휴가 따로 없어 매우 열악함에도 사회복지시설 호봉제 적용을 받고 있지 못해, 직급·연차별 차이 없어 당장 시급한 부분이 종사자에 대한 호봉제”라고 지적했다.


만 18세가 되면 자립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만 18세가 되면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 다만 장애가 있거나, 대학 진학을 하게 되는 경우,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는 기간연장이 가능한데 그렇다고 해도 최대 24세를 넘길 수는 없다. 만 18세가 넘어 자립하는 아이들에게는 지자체별로 자립정착금이 지원된다.
최선숙 국장은 “아이들마다 CDA 통장이라고 해서 매월 2~5만원 내외로 적립을 하는 게 있는데 이 부분이 아이들의 입소기간마다 달라 서울에서 5년정도 시설에 있다가 자립을 하게 되면 500만원+자립정착금 500~600만원까지 가능하지만, 지방의 경우 시설 보호기간이 짧게 되면 100만원 내외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자립하는 아이들은 이돈으로 대학을 진학하거나 월세 보증금, 기숙사비, 학원비, 교재비 등을 내야 한다”면서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자립한 아이들이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 덧붙였다.


대전 ‘밝은 내일의 집’


“모양은 달라도 함께해서 행복한 곳”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아이들이 꿈을 키워가는 밝은 내일의 집(대전시 대덕구 오정동 494-16번지). 10년 넘게 그룹홈을 운영해 오고 있다는 문연희 대표는 “처음에는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못해 힘든 점이 많았다” 고 털어 놓았다. 현재 여기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 남자아이들로 가장 어린 아이가 7살이고 다음이 초등학교2학년(1명), 5학년(1명), 중학교 1학년(1명), 2학년(2명), 3학년(1명)등 7명이다. 문 대표는 “사랑으로 대화하고 가슴으로 행동하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면서 “서로가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의지하며 지내다 보니 아이들도 표정도 많이 밝아져 보람을 갖는다”고 덧붙였다.


현재 그룹홈 전체를 관리하는 운영본부는 서울에 있지만 각 지역별로 지부가 별도 운영 중이다. 문 대표에 따르면 대전에만 15개의 그룹홈이 운영되고 있다. 그룹홈 대표들이 만나서 친목도 다지고 아이들과 생활하며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 의논한다. 문 대표는 “여기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의견은 지원비가 조금만 더 나온다면 아이들에게 먹을 거라도 실컷 먹일 텐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면서 “정부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다음은 문연희 대표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Q.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심리상태는 어떤가요.


A. 처음에 아이들이 오면 상당히 불안해해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꾸중을 하면 책상을 뒤엎는다든가 창틀로 올라가서 죽겠다고 고함을 지르는 아이도 있고요. 돌출행동으로 자신들을 표현하는 거죠. 이 아이들에게 ‘많이 힘들었구나!’ ‘이모가 얘기 들어줄게’ 이렇게 말하면 눈물부터 글썽거려요. 이 아이들 맘속에는 응어리 같은 게 있거든요. ‘우리엄마도 나를 보육원에다 버렸는데 당신도 마찬가지일거 아니야’ ‘당신이 언제까지 나를 봐줄 수 있겠어?’ ‘위선적인 얼굴로 나를 대하는 줄 내가 다 알아’ 이런 거죠.


한 번은 우리 아이 하나가 학교에서 선생님 돈을 훔쳤다고 하더라고요. 야단을 친 게 아니라 그 아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어요. 돈이 필요해서 훔친 게 아니라 관심 받고 싶어서 훔쳤다는 걸 아니까요. ‘돈이 많이 필요했어?’ ‘돈이 늘 부족하지?’ ‘이모가 용돈을 많이 못 줘서 미안해’ 그랬더니 아이가 오히려 잘못했다고 엉엉 울더라고요. 딸 둘 키울 때는 몰랐는데 남자 아이들을 키우다보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종종 발생해요.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해요. ‘하나님 저 어떻게 할까요?’ ‘제 입에 말을 주세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더라고요. 아이들 마음을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여유도 주고요.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여유를 찾는 것 같고요.(웃음)


Q. 아이들의 학교생활은 어떤가요?


A. 처음에 왔을 때 가장 힘든 게 학교에 보내는 거예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게 죽을 만큼 힘들다고 해요. 아이가 새로 와서 전학시키러 학교에 가면 안 받아 주려고 하는 경우도 많죠. 어떤 선생님은 이 아이가 1주일 정도만 학교에 나온다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해요. 무조건 나쁜 시각으로 보는 거죠. 결국 이런 시각들이 아이들을 더욱 폭력적이게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우리 아이들은 거절감에 대한 강한 상처가 있어요. 그래서 잘못을 했을 때도 절대로 잘못했다고 하지 않고 부인부터 하죠. 어느 날 저희 집 식탁유리가 깨졌는데 아이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누가 그랬는지 묻지도 않았어요. ‘안 다쳤으면 됐다’ ‘유리 없이 살자’ 그러면 편하거든요.


환경이 안 좋다고 해서 아이들이 나쁜 게 아닌데도 사회적인 시각은 그렇지가 않아요. 새로 온 아이 하나는 인터넷 중독으로 학업을 쉬다가 왔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엄마가 재혼했는데 새아버지와 갈등이 심해서 학교를 1년 간 안 갔더라고요. 이럴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핸드폰게임이나 인터넷 밖에 없잖아요. 지금 너무 열심히 학교에 다녀요. ‘공부는 조금 못해도 되지만 학교생활은 충실히 해야 한다’ 저는 늘 이 점을 강조해요. 우리 아이들은 모두 우등생이죠. 학교에 열심히 다니니까요.(웃음)


Q. 아이들이 많다 보면 많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집에서 어떤 규칙 같은 게 있나요?


A. 당연히 있죠.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폭력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용돈을 주는데 한 번은 아이 하나가 집에서 용돈을 잃어버렸어요. 반납할 시간을 줬는데도 안 갖다놨더라고요. 그래서 일곱명 모두 용돈을 반납시켰죠. 그런 다음에 통닭을 사먹었어요. 이후 돈 훔치는 일이 없어졌어요. ‘남의 돈을 훔쳤더니 내 돈도 없어지는 구나’ 그걸 알게 만든 거죠. 잘못을 하다가 걸리면 별도의 벌칙이 있어요. 두 번까지는 비밀로 해주다가 세 번째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가족회의를 열어 본인 스스로가 잘못을 얘기하도록 해요. 온 가족이 돌아가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고요. 자립해 나간 형들도 참석을 시켜서 조언도 들어요. 어떤 벌칙을 줄지도 모두가 함게 결정하고요. 물론 벌칙이라고 해봐야 ‘설거지를 해라’ ‘화장실청소를 해라’ 그런 거지만 자신을 반성하고 다시는 잘못을 안 저지도록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웃음)


Q. 밝은 내일의 집에서 자립한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되나요. 또 연락도 되나요.


A. 10년 정도 그룹 홈을 하다 보니까 6명 정도를 자립시켰어요. 그 중에는 대학에 다니는 아이도 있고 군대에 간 아이도 있어요. 대학에 진학해도 여기서 생활은 가능한데 아이들과 생활패턴이 달라서 웬만하면 독립하게 만들어요. 대전에서는 독립하는 아이들에게 300만원씩을 지원해줘요. 그 돈으로 방을 얻을 때 보증금을 거는데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이 매달 8만원을 부담해야 하거든요. 아이들이 이 부분이 힘들다고 해요. 자립한 후에도 꾸준히 연락하고 찾아오기도 하죠. 취직해서 월급타면 맛있는 것도 사서 찾아오고요. 아이들과도 친형제처럼 잘 지내요. 가끔 대전에 사는 얘들한테는 김치를 담가서 찾아 갈 때도 있어요. 어떤 녀석은 ‘이모 쌀 떨어졌어요’ 하고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이모 김치 좀 주세요’ 하면서 찾아오기도 해요. 그럴 때면 눈물 나도록 감사하죠. 저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거잖아요. 중간에 슬그머니 연락이 끊긴 아이도 있죠. 그럴 때면 연락을 안 하고 기다려요. 애들이 사회로 나가서 우리 집을 잊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Q. 남자아이들만 데리고 있다보면 힘든 점도 많을 텐데요?


A. 처음에는 여자들만 사는 집에 남자아이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맨 처음 왔던 아이가 성격이 거칠고 체중이 95kg이나 되는 아이였는데 가출을 밥 먹듯이 했어요. 정신이 없더라고요. 잘못 선택 했구나 후회도 되고요. 그런데 법원에 가서 재판을 여러 차례 받고 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이 아이들을 잘 키워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보자는. 그런데 그건 맘이고 생활은 그게 아니었어요. 얼마나 사고를 치냐면, 면허증도 없는 상태에서 자동차를 렌트해서 타고 다니다가 차가 너덜너덜해져서 들어왔어요. 여자애들과 가출도 밥 먹듯이 하고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가 미안하다’ ‘엄마가 돼 보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부족해서 못하겠다’ ‘아는 신부님이 하시는 그룹홈이 있으니 거기로 보내주마’ 그랬죠. 그런데 몸집이 큰 아이가 제 다리를 잡고 엉엉 울면서 ‘이모가 저를 사람대접해줬어요’ ‘태어나서 인간대접은 이모한테 처음 받았어요’ 그러는데 둘이서 실컷 울었죠. 그러면서 점점 고쳐가더라고요.


Q. 아이들의 돌출행동이 많은 편이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고쳐가나요.


A.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니까 돌출행동을 하는 바이오리듬 같은 게 있더라고요. 한 달 만에 돌출행동을 하는 애가 있는가 하면, 일주일마다 하는 애도 있고요. 그걸 잘 체크해야 돼요. 그랬다가 시기가 되면 미리 데리고 나가 영화도 보고 햄버거도 먹고 마음을 풀어 주는 거죠. 맛있게 도시락도 싸주고요. 그러면 아이들이 많이 달라져요. 그래서 우리가족은 쉬는 날이면 야외로 나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즐겁게 보내요. 가족이라는 인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거죠. 그러면 아이들의 돌출행동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요.


Q. 큰 딸이 엄마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데 ...


A. 엄마로서 너무나 감사하죠. 물론 제가 이 일을 하라고 이끌긴 했지만 요즘 아이들이 순순히 엄마의 결정을 따라 주진 않잖아요. 제 딸은 고등학교때부터 저를 돕다가 대학에서 전공을 아예 이 분야로 했어요. 2009년에 졸업했으니까 벌써 7년 정도를 함께 일했나봐요. 제 딸이 그래요.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그런 맘으로 오랫동안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Q. 초등학교 동창들이 직접 후원회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소개 좀 해주세요.


A. 그룹홈을 하면서 아이들 7명 앞으로 나오는 돈과 저와 제 딸이 받은 보조금만으로 9명이 생활하기엔 힘든 부분이 많아요. 그걸 아니까 보건복지부나 해당구청에서도 후원을 받으라고 권하죠. 그런데 후원받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후원하겠다고 온 분들이 와서 보고는 작은 곳이라고 후원을 안 하고 그냥 가버려요. 후원을 하면 그럴 듯하게 사진도 찍고 해야 하는데 그룹홈은 소규모다 보니까 폼이 안나잖아요.


얼마 전에는 30명 정도가 왔는데 애들이 7명이라고 하니까 그냥 가더라고요. 더군다나 지정기탁을 하면 세금혜택을 받는데 저희는 그게 어렵거든요. 그래서 ‘사랑의 열매’와 같은 큰 기부단체를 찾는 것 같더라고요. 동창들을 만나서 이런 얘길 했더니 초등학교동창 7명이 후원회를 만들었어요. 나호준 씨가 후원회장을 맡았고 임기섭 외 5명이 운영위원을 구성했죠. 너무 감사하죠. 후원회가 있다는 게 너무 든든하고요. 우리 아이들에게 큰 희망을 주고 있는 후원회, 아니 초등학교동창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Q. 힘든 투병생활을 해오셨다고 들었어요.


A. 암 수술을 두 번이나 했어요. 갑상선암과 대장암을 앓았는데 갑상선은 이미 오래 전에 수술을 했고 대장암은 수술한지 5년이 채 안됐어요. 처음에 갑상선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신혼이다 보니까 친정에서 시댁에 숨겼죠. 수술은 생각도 못했고요. 그러다 둘째 아이를 낳고 쓰러졌는데 동네 병원에 가니까 갑상선 암인데 치료를 안 해서 합병증이 왔다는 거예요. 그길로 충남대학병원으로 갔는데 이미 황달이 왔다면서 입원도 안 시켜주고 집에 가서 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투병생활을 했죠. 먹는 것도 신경 쓰고 식이요법도 하고요. 그러다 건강이 점차 회복되면서 대학에 진학해 대체의학을 공부했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건강관련 회사에 들어가 상담사로 일도 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저를 준비시키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Q. 자존감회복 프로그램을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하게 됐나요.


A. 남편이 사업을 했는데 실패하면서 어느 날 갑자가 집을 나가버렸어요. 굉장히 큰 충격이었죠. 그렇게 일 년 반을 기다리다 남편을 만나보니까 많이 변해있더라고요. 이혼을 택할 수밖에 없었죠. 두 딸을 기초생활수급자로 만들어야 생활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이혼을 하고 나니까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혼을 당한 거지’ 이런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그러다가 세상에 눈을 뜬 게 사랑의 전화 이혼자모임이었어요. 1박2일 프로그램으로 참석하게 된 건데 많은 도움이 됐죠.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데 당시는 왜 그렇게 슬픔이 엄습해 오던지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자존감치유프로그램 중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하기, 예쁜 옷 사 입기 이런 게 있었는데 30만원을 들고 나가서 옷을 사다가 방에다 펼쳐 놓고 엉엉 울었어요. 미친 짓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제 자신이 처량하기도 해서요. 덕분에 많이 달라졌죠. 이후 두 딸을 보면서 하루 세 가지씩 칭찬을 했어요. 평소 ‘넌 왜 그래’ ‘똑바로 좀 해’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 오늘 참 예쁘다’ 그러니까 애들이 놀라서 “엄마, 하던 대로 해” 그러더라고요. 두 딸한테 잘못했던 게 생각나서 무릎 꿇고 사과했죠.


나님의 자녀로 행복하게,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살자고 다짐도 했고요. 저는 애들한테 무릎 꿇고 빌면 “엄마, 괜찮아”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애들이 “엄마, 나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집 나가고 싶었어” 그러면서 펑펑 우는 거예요. 세 모녀가 그렇게 세 번을 울고 나니까 관계가 회복됐어요. 지금은 두 딸이 친구 같죠. 작은 것도 공유하려 하고요. 어쩌면 자존감회복 프로그램이 제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가정을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아요. 그러한 과정이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고요.


Q. 그룹홈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A.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가정 돌봄이’를 부탁한 게 계기가 됐어요. 중국에서 시집온 분이 남편의 폭력때문에 힘들어 하는 가정이었는데 거기서 함께 생활하면서 도와주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두 딸을 데리고 사는 처지라 서로 의지하며 살면 되겠다 싶어서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목사님께서 돌보던 아이들을 교인들의 추천으로 제가 돌보게 된 거예요. 그룹홈을 하고 나서 좋아진 거라면 집안에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혼자서 집에 들어가는 게 죽도록 싫거든요. 어려서부터 집에 사람이 많아선지 저는 사람을 굉장히 좋아해요. 지금도 우리 애들 친구들이 오면 너무 좋아요. 그래서 함께 자고 가게 해요. 아이들 생일에는 파티를 열어서 친구들도 초대해 주고요. 우리 아이들이 친구들한테 ‘우리 이모야’ ‘우리 누나야’ 이렇게 소개할 때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저는 어릴 적에 엄마가 없었어요. 언니들이 저를 키웠죠. 9남매 막내인 저에게 엄마 없는 저녁은 너무 쓸쓸했어요. 저희 집이 가게를 했는데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저녁이었죠. 그래서 밥상에 앉아 있는 게 좋아서 끊임없이 먹었던 기억이 나요. 우리 아이들도 음식을 해주면 계속 먹어요. 제가 그러죠. ‘이렇게 먹는 게 좋니?’ ‘체하면 안 되니까 천천히 먹어’ 우리 아이들이 가족이 함께 모여 있는 그 자체가 좋은 겁니다. 아이들의 그런 마음을 제가 알죠. 식성도 얼마나 좋은지 미역국 끓이려고 고기를 사다놓으면 언제 볶아 먹었는지 다 볶아 먹고 없어요. 감사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점점 밝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해가요. 이 아이들이 미래에 멋진 주인공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해요.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소녀


문연희 대표의 어릴 적 꿈은 간호사였다. 그러다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을 바꿔서 새로운 LP판이 나올 때마다 앞뒤로 달달 외웠다. 도시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수도권에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주경야독을 하며 청소년기를 열심히 살았다. 졸업후 대학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절할 수 없어서 시골로 내려갔지만 진학대신 사회생활을 택했다. “당시 유리 안에다 식물을 키우는 테라리움이 막 나올 땐데 그걸 사업아이템으로 하면 대박이 나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나 보증인을 세워야 배울 수 있다는 말에 포기하고 신사복 판매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장사수완만큼은 타고 났다고 할 정도로 업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문 대표는 이후 결혼을 하면서 사회와의 모든 인연을 끊었다.


그리고 지금, 마음에 상처를 입을 아이들을 품 안에 안았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7명을. 지난 2011년 6월13일 문 대표는 보건복지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평소 남다른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보살펴 아동복지 증진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보상이었다.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을 보고 자란 큰 딸(이은지)은 현재 ‘밝은내일의집’ 시설장으로 엄마와 함께 근무 중이다.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같은 길을 가려고 했다는 은지 씨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모녀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참된 사랑이 무언지를 일깨워주고 이들이 각자의 삶을 아름답게 꾸며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오늘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한 여름인데도 두 모녀의 이야기는 도시의 한 복판 분수대에서 뿜어 대는 물줄기처럼 시원하고 짜릿했다. 9명의 식구들이 함께 써 가는 ‘밝은내일의집’ 생활기. 이들의 좌충우돌 스토리가 계속 궁금해질 것만 같다.


MeCONOMY Magazine August 2015


김소영 기자 sy1004@m-econo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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